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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싱어 인기 부럽지만 ‘수퍼 바리톤’ 외길 걸을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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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2호 19면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독창회 여는 카디프 콩쿠르 우승자 김기훈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보기 드문 독창회가 열린다. 독창회에서 66인조 풀오케스트라 반주로 가곡 한 곡 없이 로시니 ‘세비야의 이발사’, 모차르트 ‘코지 판 투테’, 바그너 ‘탄호이저’ 등 유명 오페라 아리아로만 전체 프로그램을 짰다는 것은 잔뜩 벼린 칼을 내세운 ‘진검승부’가 아닐 수 없다. 바리톤 김기훈(30)의 ‘카디프 싱어 오브 더 월드’ 우승 기념 리사이틀이다.

김기훈은 ‘수퍼 바리톤’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위해 독창회를 오페라 아리아로만 꽉 채웠다. 김경빈 기자

김기훈은 ‘수퍼 바리톤’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위해 독창회를 오페라 아리아로만 꽉 채웠다. 김경빈 기자

김기훈은 요즘 세계에서 가장 핫한 성악가다. 지난 6월 한국인 최초로 메인 프라이즈 우승을 거머쥔 영국의 카디프 콩쿠르는 초청을 받아야 참가할 수 있는 ‘성악 콩쿠르의 끝판왕’으로, 콩쿠르가 진행되는 열흘 내내 BBC로 생중계되는 ‘글로벌 오디션’이다. 심사위원들이 그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방송을 타며 더욱 화제가 됐다. “영국에선 시청률이 20% 넘게 나오는 인기 프로그램이예요. 예전 ‘슈퍼스타K’의 성악 버전이랄까. 리허설하고 호텔로 돌아가는데 길에서 사람들이 ‘기훈 킴?’하며 아는 척을 하더군요.”

격투기 선수로 전향 고민하기도

만면에 ‘살인미소’를 머금은 여유로운 무대 매너는 백전노장 클라쓰인데, 성악에 입문한 지 이제 10년을 갓 넘겼다. 드라마 ‘펜트하우스’의 살벌한 예고 출신 금수저들과 달리, 전남 곡성에서 뛰놀다가 고3 때 노래를 시작한 ‘흙수저’다. “친구들은 벼농사를 지어요.(웃음) 곡성이 ‘찐 시골’이라 제가 어릴 땐 음악적 인프라가 전혀 없었고, 음악 시간엔 보통 자습을 했죠. 취미로 친구들과 밴드를 하고, 성악 발성을 흉내 내 가요를 부르는 게 개인기이긴 했어요.”

음악 인생이 시작된 건 교회에서다. 성가대 세미나 강사가 그의 목소리에서 “세계적 성악가가 될 그릇”을 발견한 것이다. “아버지 말씀이 제가 날 때부터 울음소리가 다른 애들 너댓배로 우렁찼다고 해요. 음악성은 자꾸 보였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으니 일부러 음악을 멀리하게 하셨다죠. 지원해줄 형편이 안 되는데 음대에 가겠다고 하니 가슴 아파하시다가, 다행히 광주에서 정말 저렴하게 렛슨 해주시는 선생님을 만나 입시를 치를 수 있었어요.”

급상경한 몸으로 쟁쟁한 예고생들 사이에서 당당히 연세대에 합격했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미안하지만 장학금 주는 대학에 진학해 달라”는 아버지의 부탁에 온 가족이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다고. “연대 가서 꼭 장학금 받고 다니겠다고 약속하고 들어갔는데, 처음엔 굉장히 쫄았어요. 서울 출신 동기, 선배들이 다 대가처럼 보여서 소외감도 느꼈죠. 하지만 금방 적응했습니다. 음악 하는 사람들이 다들 착하거든요.(웃음)”

카디프 콩쿠르 우승 트로피 수상 모습. [사진 커스틴 맥터넌]

카디프 콩쿠르 우승 트로피 수상 모습. [사진 커스틴 맥터넌]

카디프 콩쿠르 우승 이전에도 이미 ‘월드 클래스’였다. 2016년 서울국제음악콩쿠르 우승을 비롯해 2019년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와 ‘도밍고 콩쿠르’라 불리는 ‘오페랄리아 국제성악콩쿠르’에서 연달아 2위를 했다. 덕분에 속칭 ‘군면제권’도 3개나 되지만, 그는 ‘군필’이다. “속 편하려고 다녀왔어요. 운동선수나 가수나 경력이 이어지는 게 중요한데, 군대 때문에 발목 잡히는 사람들 보면서 미연에 방지하자는 마음이었죠.(웃음)”

‘발목 잡히기 싫어서 간’ 군대가 발목을 잡았다. 씨름 선수 같은 당당한 풍채에 격투기 선수 제안을 받을 만큼 힘도 세고 운동도 잘하기에, 군대에서도 스스로 ‘강철인간’이라 믿고 몸을 사리지 않았던 것. 온갖 행사를 원맨쇼처럼 소화하다 그만 성대가 손상됐다. 병원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는 목”이라고 진단할 정도였다.

“보병으로 입대했는데 군악대에 차출됐죠. 무슨 악기를 다루느냐 묻길래 피아노와 리코더 좀 분다고 하니 튜바를 시키더군요.(웃음) 하루 8시간 이상 연습하며 마스터했는데, 연주회를 한번 하면 이런 식이에요. 브라스심포니를 불고 나면 성악을 하러 불려 나가고, 들어오면 곧바로 사물놀이 순서가 되죠. 어려서 사물놀이도 배운 덕분에 그것도 제 몫이었어요. 그 다음엔 아카펠라를 해야 하고, 다시 밴드와 함께 ‘붉은 노을’을 부르고 있는 저를 발견하죠. 그런 행사를 정말 많이 뛰었어요.”

성대가 고장난 채로 복학을 하니 성적은 바닥을 쳤고, 슬럼프가 찾아왔다. “그때 열달 넘게 방황을 했어요. 마치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성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여태 뭘 해왔는지조차 모르겠더라고요. 나름 유망주로 불렸었는데, 수치심에 도망가고 싶었죠.”

때마침 격투기 선수 제안까지 받아 고민은 더 깊어졌다. 포기 직전, 지도교수였던 김관동 교수를 찾아갔다. 고3 때 속성으로 성악을 습득한 뒤 누구의 조언도 듣지 않고 오만하게 자기 고집만 세워왔던 그가 처음으로 ‘선생님’에게 매달려 보기로 한 것이다.

“배움의 시간이 짧았잖아요. 돌이켜보면 기초가 약해서 쉽게 무너졌던 것 같아요. 다친 성대는 결국 ‘김관동 발성법’으로 치유했는데, 선생님 시키는 대로 따르니 거짓말처럼 회복이 됐어요. ‘테너처럼 부르라’는 가르침대로 인위적인 무게를 버리니 해결되더군요. 결국 그 슬럼프가 오늘의 저를 있게 한 것 같아요. 이번에 우승하고 전화드렸더니 선생님도 눈물이 난다고 하시더라고요.”

클래식 애호가 사이에서 이미 탄탄한 지지를 받고 있지만, 대중적 인기는 다른 문제다. JTBC ‘팬텀싱어’ 출연을 고민했던 이유다.

“라포엠의 바리톤 정민성은 연대 동기고, 레떼아모르의 베이스바리톤 길병민과도 각종 국내 콩쿠르에서 동고동락한 사이죠. 솔직히 엄청 부러워요. 저도 제작진의 연락을 많이 받았고, 출연을 고민 안 했다면 거짓말이죠. 국제 콩쿠르에 입상했어도 국내에선 소용없으니까요. 다른 친구들도 제가 나올까 봐 걱정들 했다네요.(웃음)”

유럽에선 오페라 가수도 대중적 인기

하지만 결국 미디어의 힘보다 자기 자신을 믿기로 했다. 자타 공인 ‘수퍼 바리톤’에게 거는 한국 성악계와 클래식의 순수함을 고집하는 애호가들의 기대가 절대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장르에 거부감은 전혀 없어요. 크로스오버 음악도 좋아하고, 친구들의 티켓파워도 탐이 나죠. 그런데 저는 온전히 저를 위해서만 살 수 없는 상황이 되버렸네요. 나름대로 저를 알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죠.”

3년 전부터 독일 하노버를 기반으로 유럽에서 활동하며 느낀 건 오페라 가수도 대중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BBC에서 성악 콩쿠르를 열흘 동안 생중계하는 것도 그래서다. “하노버는 작은 도시인데, 학교에서 소규모 음악회를 열어도 어떻게들 알고 찾아오세요. 오페라도 관객들이 정색하고 오는 게 아니라 자연스런 사교모임을 겸하고 있죠. 오페라 가수를 존중해준다는 것도 자주 체감해요. 이번에 카디프 콩쿠르 갔다가 돌아올 때도 그랬죠. 독일 공항 입국심사대 직원들이 표정 안 좋기로 유명하잖아요.(웃음) 줄을 서 있는데 바로 앞 중국인을 유독 까칠하게 대하던 사람이 제 비자에 직업이 오페라 가수라고 적힌 걸 보고는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더군요. 유튜브로 찾아보겠다면서 밝게 웃더니, 친절하게 보내줬어요.(웃음)”

글에 담기 어렵지만, 그는 퍽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대화 속 등장인물들에 수시로 빙의하고, 사진 촬영 때도 립싱크만으로 거대한 아리아를 부르는 고도의 연기력에 입이 떡 벌어졌다. “오페라 가수는 기본적으로 연기가 필수라서요. 연기가 체질인 것 같아요. 너무 재밌어요. 웃긴 역할이라면 오늘은 어떻게 많이 웃길까 고민하죠. 어린이 오페라에서 애드립도 해봤는데 애들이 다 빵 터지더군요.”

‘토스카’의 악역 스카르피아를 꿈의 배역으로 꼽는 이유도 재미있다. 자신이 ‘웃는 남자’라서다. “멋있는 악역인데요, 제가 평소에 늘 웃고 다니잖아요. 무서운 사람이 무서운 역할하면 그런가보다 싶지만, 웃고 다니는 사람이 나쁜 역할하면 더 오싹할 테니까요.(웃음)”

그의 ‘살인미소’가 왠지 좀 다르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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