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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석양 붉은 덩어리의 마법, 유리에 녹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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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2호 18면

‘2021 올해의 공예상’ 받은 김준용 작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선정하는 ‘2021 올해의 공예상’의 주인공은 김준용(49) 유리공예 작가다. 올해 4회째인 이 상은 한국 공예 발전에 기여하고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는 창작자에게 주어진다.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공예디자인학과 교수이기도 한 김 작가는 유리공예 불모지였던 국내에서 20년간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현해왔다. 2018년에는 ‘전 세계 공예작가들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제2회 로에베(LOEWE) 크래프트 프라이즈’ 파이널 30인에 선정됐고, 이듬해에는 작가가 아닌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1만 시간의 법칙

작품명 ‘어떤 저녁’. 서쪽 하늘에서 번지는 노을빛이 연상된다. [사진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김준용]

작품명 ‘어떤 저녁’. 서쪽 하늘에서 번지는 노을빛이 연상된다. [사진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김준용]

“유리의 가단성(외부 충격에 깨지지 않고 늘어나는 성질), 다양한 색상, 불투명도와 반투명도를 엮어 만든 이 미묘한 그릇은 시간과 장소의 초상화다.”

김 작가가 2018년 ‘로에베 크래프트 프라이즈’에 출품한 ‘석양 속의 눈물(Tears in the Sunset)’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평가다. 언뜻 들으면 모든 유리가 가진 물성에 대한 일반적인 해설처럼 보이지만, 전문가들의 이런 평가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는 ‘블로잉 기법’과 ‘캐스팅 기법’을 함께 사용한다. 현존하는 유리공예 작가 중 두 기법을 동시에 사용해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김 작가가 거의 유일하다. ‘로에베 크래프트 프라이즈’ 심사위원들이 높이 산 부분도 바로 이 대목이다.

블로잉은 유리공예의 대표적인 전통기법이다. 규석과 소다를 녹여 만든 말랑말랑한 유리를 돌돌 말아 1600℃의 뜨거운 용해로에 넣었다가 꺼낸다. 연결된 긴 파이프로 숨을 불어넣고, 코르크·신문·쇠 가위 등으로 표면을 조이고 누르며 형태와 디자인을 잡는다. 그런데 이렇게 만든 유리는 원래의 유리 덩어리가 가진 크기 때문에 일정 정도 이상의 두께를 갖지 못한다. 대부분의 유리잔과 화병이 안은 비어 있고 두께가 얇은 이유다.

작품명 ‘정령의 풍경’. 위로 갈수록 두께가 얇아지면서 진청색에서 연둣빛을 띤다. [사진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작품명 ‘정령의 풍경’. 위로 갈수록 두께가 얇아지면서 진청색에서 연둣빛을 띤다. [사진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김 작가는 블로잉 과정에서 원하는 부위에 유리를 덧입힌다. 커다란 혹처럼 우툴두툴해진 유리가 돌처럼 단단하게 굳으면 다이아몬드 그라인더로 깎고 다듬으면서 형태와 질감을 만드는데, 이는 ‘캐스팅 기법’의 장점을 취하는 과정이다. 왁스로 만든 몰드(거푸집)에 유리 물을 부어 형태를 만들고 그라인더로 조각하는 캐스팅 기법은 유리 두께를 몰드의 두께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김 작가가 이처럼 복잡하고 번거롭게 서로 다른 기법을 섞어가면서까지 유리 두께에 천착하는 이유는 색의 자유로운 농담(濃淡) 표현을 위해서다.

“바닷물의 깊이가 얕으면 물이 에메랄드빛으로 보이지만, 심해는 진청색을 띄잖아요. 유리도 두꺼울수록 진하고, 얇을수록 옅은 색을 띄죠. 그 오묘한 농담을 자유자재로 표현하기 위해 저는 블로잉 기법과 캐스팅 기법을 병행하는 겁니다.”

색유리도 직접 만든다. 유리 원료에 금가루를 섞으면 보라색, 은가루를 넣으면 노란색, 산화철을 녹이면 녹색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만든 색유리를 어떤 부분은 두껍게, 어떤 부분은 얇게 펼치고 깎아 북극의 오로라처럼 신묘한 컬러 그러데이션을 만드는 게 김 작가만의 기법이다.

작품명 ‘저녁 7시30분 청주’. 블로잉 기법과 캐스팅 기법을 병행하는 김 작가의 작품들은 유리지만 표면 질감이 다양하다. [사진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작품명 ‘저녁 7시30분 청주’. 블로잉 기법과 캐스팅 기법을 병행하는 김 작가의 작품들은 유리지만 표면 질감이 다양하다. [사진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수없이 실험하면서 데이터를 모았죠. 이 재료는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다 깎았을 때의 두께와 색감은 어떻게 해야 유지할 수 있는지, 저만의 노하우를 갖추느라 꽤 오래 걸렸어요. 사람들이 말하는 1만 시간의 법칙이 정말 맞는 말이구나 싶었죠.”(웃음)

‘1만 시간의 법칙’은 미국의 심리학자 앤더스 에릭슨이 1993년 발표한 논문에서 주장한 개념이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1만 시간 이상의 훈련이 필요 하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일 거예요. TV 프로그램 ‘뽀뽀뽀’에서 유리공장 영상을 봤어요. 두꺼운 철문을 여니까 칠흑처럼 까만 통 한가운데서 빨갛기도 하고 주황색 같기도 한 불덩어리가 출렁거리는데, 정말 놀랍도록 아름다운 광경이었어요.”

유리로 쓰는 수필

김준용 작가. [사진 김준용]

김준용 작가. [사진 김준용]

그렇게 ‘유리’라는 세계에 빠지게 된 그는 1991년 국민대학교 공예미술학과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 유리공예를 전공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0년 전 한국의 유리공예는 도자·금속·목공예 등에 비해 영향력이 형편없이 적었다. 출토 유적에서 알 수 있듯 삼국시대부터 찬란했던 전통은 맥이 끊긴 상태였고, 이탈리아·미국·일본에서 발전을 거듭해온 신기술은 이제 막 한국으로 넘어오는 찰나였다. 4대 독자로 애지중지 자란 청년 김준용은 늘 좀 더 넓은 세계로 나가 자신을 증명하고 싶다는 욕망이 컸다. 여기에 유리공예의 신세계를 개척해야겠다는 결심이 더해지면서 대학 졸업 후 미국 맨체스터 공대 유리학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돌아와 국내외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로 지낸 지 20년. 청년 시절의 자신과 똑같이 유리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학생들을 가르치며 보낸 지도 10년이 지났다.

그가 지금까지 손끝으로 체득한 기법과 기술은 점점 더 넓고 섬세해졌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석양’이라는 테마는 한결같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오랫동안 지배했던 ‘출렁이는 붉은 덩어리’를 만들려는 욕망은 대학 시절 지리산 여행에서 만난 석양을 통해 더욱 구체화됐다.

2018년 ‘로에베 크래프트 프라이즈’ 파이널 30에 오른 김준용 작가의 ‘석양 속의 눈물’

2018년 ‘로에베 크래프트 프라이즈’ 파이널 30에 오른 김준용 작가의 ‘석양 속의 눈물’

“장마철 비구름을 헤치고 산장에 도착한 날,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할 때였죠. 내내 무겁게 깔렸던 회색빛 운해 한가운데가 순식간에 석양빛으로 붉게 물들어가는데,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어요. 영화 ‘라라랜드’에서 해가 저무는 시간을 ‘매직 아워(magic hour)’라고 하던데, 정말 온 세상을 마법처럼 바꿔놓는 순간이었죠.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내가 만든 유리 작품으로 마법 같은 시간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이 작품의 주요 테마가 됐죠.” 작품 제목에 유난히 ‘석양(sunset)’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7.30 pm’ 등 구체적인 시간을 적은 작품명도 여럿이다.

“작품 하나를 완성할 때마다 유리로 쓰는 수필이라는 생각을 해요. 유리를 통과한 빛을 통해 내가 경험한 어느 순간을 관객들과 공유하는 거죠. 저는 호주 아들레이드 해변의 석양을 상상하며 작품을 만들었지만, 관람객의 머릿속엔 저마다의 석양의 추억이 펼쳐지겠죠.”

2013년 ‘가나자와 국제 유리 공모전’에서 은상을 수상한 ‘파도 속의 석양’.

2013년 ‘가나자와 국제 유리 공모전’에서 은상을 수상한 ‘파도 속의 석양’.

관람객과의 공감은 이제 이탈리아 밀라노 디자인위크 전시 현장에서 이뤄질 예정이다. 5일부터 10일까지 밀라노 팔라조리타 복합문화공간(온라인 전시는 9월 말까지 푸오리살로네 홈페이지)에서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주최하는 한국 대표작가전 ‘사물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다.

그는 후배 작가들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해외 공모전은 많이 시도할수록 좋아요. 공모전마다 성격과 목적이 다 다르거든요. 자신의 작품과 맞는 궁합이 따로 있다는 얘기죠. 서양의 공예 전문가들과 이야기해 보면 한국은 영국·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공예 강국으로 이미 자리 잡았어요. 그러니 자신감을 갖고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을 준비해 문을 힘차게 두드려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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