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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김, 공연 때 VIP석에 외국인 초대 ‘K컬처’ 알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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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2호 16면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27〉 백색 옷차림 ‘문화인’

보통들 말한다. 하루하루 살아간다고. 그러나 나는 좀 다르다. 내 경우는 하루하루가 아니라 주일주일 살아간다. 1일씩 살아간다는 말이 아니라 일주일 7일씩 살아간다는 얘기다. 그렇게 된 건 벌써 반년이 넘었다. 하루하루가 주일주일로 바뀌게 된 것은 바로 지금 귀하가 읽고 계신 중앙SUNDAY 연재 때문이다.

중앙SUNDAY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중앙일요일쯤 된다(아! 나의 훌륭한 영어 실력!). 이름은 일요일이지만 토요일마다 발간되는 신문에 매주 글을 써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사실 하루하루 대신 토요일 토요일로 바꿔야 하는데 글자 수가 너무 많아 주일주일마다 살아가는 삶 혹은 인생으로 슬쩍 바꾼 것이다.

김흥수 화백, 흰색 복장 닮은꼴

생전 서양화가 김흥수 화백 부부와 함께한 조영남씨. 가운데가 부인 장수현씨. [사진 조영남]

생전 서양화가 김흥수 화백 부부와 함께한 조영남씨. 가운데가 부인 장수현씨. [사진 조영남]

미안하고 죄송하다. 연재 마지막 회에나 써야 할 내용을 꺼내서 말이다. 400자 원고지 10매에 쓴 나의 원고를 본 사람들은 통상 그런다. “어! 이런 원고지가 아직도 있었나?” 하면서 나를 석기시대 사람쯤으로 보곤 한다. 이 원고도 물론 400자 원고지에 쓰는 거다.

지난 한 주를 살아가면서 나는 깜짝 놀랄 일이 있었다. 요즘 말로 깜놀했다. 옛날 취미란 같은 데에 보통 음악감상이니 독서 같은 걸 썼다. 그러면 대충 통과됐다. 아! 우리의 젊은 시절은 얼마나 저급했던가. 음악감상이나 독서 같은 건 누구나 매일 밥을 먹듯이 일상이어야 하는데 그런 걸 무슨 특별한 취미로 취급했으니 말이다. 요즘 취미란을 메우라는 요청이 있으면 나는 거기다 ‘깜놀하기’를 적어 넣겠다. 깜짝 놀라는 일이 아무 때나 일어나서 소중한 게 아니다. 요즘처럼 무감각해진 코로나 시대에 깜놀이 생긴다는 건 매우 소중한 일이다.

지난주 깜놀은 삼성 이건희 컬렉션과 관계있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건너편 소격동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에 나온 희귀본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의 작품에 깜짝 놀란 것이 아니다. 이건희 컬렉션 특별 전시가 코로나로 입장 인원을 제한한 무료관람인데 글쎄 무료 티켓값이 무려 10만원까지 뛰었다는 뉴스에 깜놀이 아니라 기겁을 한 것이다. 내가 놀란 건 10만원이라는 액수가 아니다. 공짜 표를 10만원까지 지불하고 그걸 봐야겠다는 우리 시민의 높은 문화정신이다.

아니! 이 정도로 우리가 문화시민이 됐단 말인가. 이 문제엔 내가 깜놀한 이유가 따로 있다. 뭐냐. 내가, 이 조영남이 이건희 컬렉션 최초 오픈 전시 하루 전날인 지난 7월 20일 오후 4시에 관람했다는 사실이다.

지난주에 소개한 나를 최초로 한국 현대 미술계로 이끌어주신 용인 소재 한국미술관 김윤순(작고하심) 관장과 오랜 친구사이셨던 김종규(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님이 나를 초대하셨던 거다. 외국에서도 중요 전시 때는 종종 오픈 전날 사전 전시를 공개한다. 이때는 소위 셀럽, 주요 문화계 인사를 위한 특별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김종규님은 지난 몇 개월간 나의 중앙SUNDAY 연재가 나간 후부터 토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전화벨을 울린다. 연재 재밌게 잘 봤다는 격려 전화다. 그러던 중 당신네(국립현대미술관)가 이건희 컬렉션 전시 개막 전야제에 초대를 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한국 문화계에 대표 인사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돌아오면서 든 생각은 이거다. 내가 다름 아닌 김흥수, 앙드레 김이 된 것이다. 그분들 자리를 내가 이어받은 거다.

그런 자리엔 거의 매번 흰색 위아래 턱시도 복장에 흰색 백구두까지 착용하신 한국인 살바도르 달리 같은 고 김흥수 화백과 젊은 여성(나중에 부인이 되신)이 나란히 나타나 시선을 끌어갔다. 또 한 분은 똑같은 흰색이지만 본인이 손수 제작한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제복 디자인, 앙드레 옷차림이라고 밖엔 설명할 도리가 없는, 모습 자체가 예술 그 자체셨던 앙드레 김이다. 그 두 분이 등장해야 대한민국 문화행사는 완성이 되는 것이다. 나 혼자의 생각이 그랬다. 두 분은 세상을 등지시고 아직은 살아 있는 불초소생(낯간지럽다)이 등장을 했으나 어림도 없다. 존재감적인 입장에서 말이다.

우선 어필부터 틀리다. 앞의 두 분은 하얀 백색 차림이신데 나는 정 반대다. 검정 물감 들인 군인들 입는 야전 잠바 차림이니 비교 자체가 불가능이다. 그렇다면 만약 중앙SUNDAY 독자님 제위께서 나한테 김흥수, 앙드레 김 두 분 중에 누가 더 문화인 역할을 했느냐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대답할 수 있다. 앙드레 김이다.

김흥수 화백은 주로 미술 쪽 행사에 등장하셨지만 앙드레 김은 전천후였다. 음악이건 미술이건 가리는 게 없었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김흥수 화백과 똑같은 백색의 옷차림이었지만 양드레 김은 옷차림과 함께 가는 독특한 얼굴 화장법으로 시선을 끌 수 있었다.

외관뿐만 아니다. 문화 사절 측면에서 볼 때 앙드레 김은 외관에 딱 들어맞는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 구사해냈다. 꼭 영어도 아니고 불어도 아닌 그렇다고 한국식 본래의 언어도 아닌 세상 모든 언어를 합친 듯한 그만의 언어를 쓰곤 했는데 나 같은 까만 후배한테도 반드시 존댓말을 구사했다. 돌이켜보면 앙드레 김의 언어는 그야말로 한국 랩, 더 자세히 말해 한국 랩 언어의 선각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앙드레 김을 우리나라 근대사에 최상의 문화인으로 꼽는 것은 그의 행동반경의 위대함 때문이다. 그의 위대함은 우리의 문화를 그 누구보다 온 세상에 널리 알렸다는 점이다. 당시 웬만한 공연제작자들은 중요 공연 때마다 매번 공연장 앞쪽의 VIP 10여 석 가량을 사전에 비워두는 게 관례였을 정도다. 좌석을 예약 구매한 앙드레 김이 외국인을 대동하고 나타나곤 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중요한 무대에선 거의 매번 흰옷 차림의 앙드레 김의 모습이 내려다보였을 정도다. 지금 생각인데 앙드레 김이 매번 수십장의 티켓만 매입하지 않았다면 빌딩 몇 채쯤은 거뜬히 구입했을 것으로 본다. 수십장 입장권 구입에 저녁 식사 초대에 차라도 한잔씩 마시는 걸 생각만 해도 어휴!

나한테 앙드레 김이 큰 어른으로 보인 것은 그의 언행과 다른(보통 때 상당 부분 여성 스타일로 어필된다) 솔직 담백함, 남자다움, 사내다움에 있다. 나는 그때 정말 깜놀했었다. 무슨 얘기냐면 1999년 당시 정치적으로 요란했던 고위 공직자의 옷 스캔들을 기억하실 거다. 청문회장에서 절차에 따라 생년월일과 출생지 및 이름을 대야 해서 그는 참으로 담담하게 본적지 구파발, 이름을 김봉남이라고 댔는데, 그의 외관과 출생지 이름이 극히 한국적이라 당시 이국풍 이름의 옷로비에 연루됐던 지도층 인사들과 대비돼 묘한 웃음을 자아냈다. 정작 앙드레 김 본인은 꺼떡없었다. 의연했다.

누가 믿겠는가. 나는 앙드레 김이 살아 계실 때 그러니까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 해까지 매해 12월 초만 되면 양손으로 끌어안기에는 너무 큰 하얀색 꽃다발을 배달받곤 했다. 그 안의 모든 나뭇가지가 흰색으로 옷을 입고 그 새하얀 색과 멋지게 조화를 이루는 금빛 방울들로 장식된 꽃다발이다. 바구니부터 온통 흰색이라 그렇게 멋지게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꽃다발이 너무 좋아 이듬해 2월 초까지 현관에 배치해 놓고 있었다.

앙드레 김은 한국 랩의 선각자

한국의 대표적인 패션 디자이너였던 앙드레 김. 개성 있는 디자인과 말투로 사랑받았다. 2010년 작고했다. [중앙포토]

한국의 대표적인 패션 디자이너였던 앙드레 김. 개성 있는 디자인과 말투로 사랑받았다. 2010년 작고했다. [중앙포토]

내가 꽃 보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단 한 번도 못했는데 매년 꽃다발이 연말에 어김없이 도착했다. 고맙다는 인사말 못 드린 게 못내 아쉽다.

어떤 해에는 내가 콘서트에서 노래를 하다가 트로트 ‘잘 있거라 부산항’을 부를 때 끝부분에 “기다리는 순정만은 버리지 마라 찬, 버리지 마라 찬”을 했을 때 전화가 다음 날 왔다. 서슴없이 이렇게 말하셨다.

생전 앙드레 김이 조영남씨에게 해준 덕담을 제목으로 붙인 조씨의 2002년 산문집 『조영남씬 천재예요!』 책 사진. [중앙포토]

생전 앙드레 김이 조영남씨에게 해준 덕담을 제목으로 붙인 조씨의 2002년 산문집 『조영남씬 천재예요!』 책 사진. [중앙포토]

“영남씨, 그렇게 노래하지 마세요. 안 해도 돼요” 해서 실제로 노래 방법을 바꾼 적이 있는데 지금 살아 계셔서 만일 나한테 “영남씨! 이젠 노래 그만 하세요” 한다면 나는 곧장 노래를 그만두겠다. 내 목소리가 늙은 몸에서 나오는 늙은 목소리로 들린다고 한다면 그러겠다는 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우수한 문화인이라고 믿는 분의 조언 아닌가.

옛날 어느 신문사와 함께 정명근(정명화·경화·명훈 트리오의 수석 매니저 겸 정씨 7남매 중 둘째)씨가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공개하면서 나더러 개봉 첫날 내가 아는 한국 문화인들을 총출동해보라고 해서 거의 500명 가까이 내가 알고 있던 거의 모든 계통의 친구들을 특별 초대했던 적이 있다. 2002년의 일이다. 나는 뮤지컬 공연 시간 전에 입구에 서서 각종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앙드레 김 선배가 다가와 축하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내 손을 덥석 잡으시더니 앞뒤 없이 특유의 앙드레 김 말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조영남씨는 천재예요.”

나는 우쭐한 기분에 들떠 그때 수필집을 내는 기회가 생겼길래 제목을 앙드레 김이 인사차 선물해준 말로 쓰자고 출판사에 전했더니 그게 통과돼서 수필집 제목이 ‘조영남씬 천재예요!’가 됐다. 제목이 유치해서 그랬는지 책은 매우 신통치 않게 팔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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