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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성탁의 시선

배달 노동자에 폭언 '과잠남'은 우리네 자화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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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사진 SBS뉴스 영상 캡처]

[사진 SBS뉴스 영상 캡처]

"못 배운" "나이 X먹고 " 발언 충격 

 “그러니까 그 나이 X먹고 나서 배달이나 하지 XX XX야.” 최근 SBS 보도로 공개된 영상에서 한 청년이 배달 노동자에게 막말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건 몹시 불편했다. 배달 노동자는 엘리베이터에서 통화하던 청년이 마스크를 내리자 “죄송한데 마스크 쓰고…”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못 배운 XX가”, “일찍 죽겠다. 배달하다 비 오는데 차에” 같은 폭언이 돌아왔다. 청년은 고려대 ‘과잠’(학과 점퍼)을 입고 있었는데, 실제 이 학교 학생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아버지뻘 배달 노동자를 쫓아가며 조롱하는 청년의 모습은 거북함을 넘어 다른 감정까지 안겨줬다.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짐작하던 뭔가를 갑자기 확인해버린 듯한 당혹감이 함께 밀려왔다. 영상 속 모습은 흥분을 참지 못한 한 젊은이의 일탈 행위일 수 있다. 고려대 학내 커뮤니티에서 다른 학생들이 보인 반응도 반성해야 마땅한 큰 잘못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가슴이 철렁했던 건 단지 그 청년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폭언을 한 청년의 모습은 배달 노동자의 헬멧에 달린 카메라에 찍힌 것으로 보인다. 신분이 노출되지 않는 익명의 상황이 거침없이 속내를 드러내게 했을 수 있다. 과잠까지 입은 젊은이가 세상에 이렇게 노출될 걸 알았다면 저러지는 않았을 텐데, ‘과잠남’보다 나이 많고 사회생활도 한 어른들은 과연 다른 모습인가 싶다.

 익명에 기댄 막말, 어른은 다른가 

 내가 누군지 남이 알 수 없는 온라인 공간에서 어른들도 날마다 막말과 비하, 저주를 쏟아내고 있다. 특히 정치적 성향에 따라 상대 진영을 공격하며 쓰는 용어는 이미 지역감정 조장이나 욕설 수준을 넘어 인용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이다. 중장년층 구분 없이 상당수가 대면 상태라면 부끄러워 도저히 할 수 없는 언어의 배설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인터넷 커뮤니티를 들여다보고 자란 젊은이들의 언어와 반응이 어른들이 보여준 양태와 다를 것이라 기대할 수 있을까.

 과잠남은 직업으로 사회적 지위의 고하를 나누고 그 배경에 학력을 두는 인식을 드러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아 한국은 배달 노동자 덕분에 편리하게 위기를 지나고 있다. 이런 고려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청년의 마음속에는 자신보다 못해 보이는 이들에 대한 무시가 자리잡고 있다. 이 역시 이 청년 등 일부만 가진 뒤틀어진 의식이라고 하기 어렵다. 젊은이들이 밟아온 우리 교육의 현실 때문이다.

 국내 교육이 입시에 맞춰져 있다는 건 대입에 가까울수록 확연해진다. 한때 학생의 적성과 품성 등을 거르는 대입 전형이 도입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교육 효과와 부모 배경에 따른 불공정이 불거지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남은 게 고교 내신과 수능이다. 생활기록부에 교사들이 적는 내용이 있지만, 이 역시 입시에 도움이 되느냐가 관심사다. 아이들은 밤까지 학원을 돌고, 공부로 매겨진 서열을 받아들인다. ‘못 배운’ 같은 속내를 지닌 젊은이가 더 있을 수 있는 배경이다.

 경쟁해도 출발선 차이나는 것 알아야

 경쟁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도 요즘 젊은이들의 특징이다. 경쟁 과정에 불공정이 개입하면 가차 없이 문제를 제기한다. 그래서 상위권 대학에 들어간 것은 내가 기회비용을 들이며 남보다 열심히 한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공정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출발선이 모두 같지 않다는 점을 일깨우는 어른은 많지 않다. 학원을 너무 많이 보내 탈이 나는 동네가 있지만, 돈이 부족해 못 보내는 가정이 더 많다는 것 말이다.

 연구에 따르면 국내에는 부모의 학력과 경제력이 사는 지역을 결정짓고, 사교육 등 지역 인프라가 다시 학력 격차를 낳는 빈부 격차의 순환 구조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좋은 교육과 고소득 직업을 갖는 데에 자신의 능력과 노력 때문만이 아니라 좋은 환경을 타고난 덕도 있다. 격차를 이해하고 이를 해소하며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없으면 “그 나이 X먹고 나서 배달이나…” 같은 폭언이 나온다.

 과잠남은 마포구 엘리베이터에만 있지 않다. 과잠을 입을 나이가 지난, 우리 어른들 속에 더 많다. 기성세대부터 바뀌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젊은이들이 깜짝 놀랄 속내를 드러낼지 모른다. 인터넷 댓글부터 해외처럼 소셜미디어와 연동해 달도록 바꾸면 좋겠다. 적어도 얼굴을 까고 쓰면 막말과 폭언은 줄어들 거다. 장시간 일하지만 배달 노동자의 월수입이 대기업 직원에 못지않고, 직업에 대한 생각도 저마다 다른 시대라는 대화라도 자녀와 나눠보면 어떨까. 우리네 자화상 같은 과잠남을 줄이기 위해.

김성탁 논설위원

김성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