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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심은경의 미국에서 본 한국

아프가니스탄, 한국 그리고 미국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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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

2021년 8월은 끔찍한 달이었다. 코로나19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기후변화 문제도 시작에 불과하다는 현실이 거침없이 드러난 여름이었다. 게다가 미국이 지난 20년 동안 기울여 온 아프가니스탄 재건 노력의 급격한 붕괴는 장단기적으로 새로운 도전과 불확실성을 안겨주었다.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한 가운데 미국과 전 세계는 즉각적인 인도주의·이주·안보 문제에 직면해 있다. 미국의 수치스러운 패배로 보이는 이번 일이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도 아직은 불확실하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아프간 철군이 여론의 지지와 국내외 전략적 우선순위를 고려한 옳은 결정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사전 조율과 협의 없이 강행해 유럽과 다른 동맹국들의 분노를 샀다. 더욱이 미국은 아프간 군과 정부의 빠른 붕괴와 탈레반의 진격을 예상치 못했다. 혼란스러운 대피 과정은 바이든 대통령의 역량과 판단력에 흠집을 냈다. 지난달 미군 13명과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카불공항 테러는 아프간 미군 주둔 최근 10년 중 가장 치명적인 날이자 바이든 대통령에게 가장 암울한 날이었다. 부실한 계획과 현지 혼란 속에서도 고무적인 것은 공수작전 자체가 성공적이었다는 점이다. 바이든 정부는 초기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세계 각국 정부와 민간인들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총동원되고 있다. 이런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아프간 철수작전 바이든에 흠집내
한국, 아프간 재건에 20년간 헌신
한국의 신속한 구출과 환대 인상적
미들파워 한국의 존재감 주목해야

외교·안보 분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아프간 계획 전반, 나아가 미국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과거와 미래의 역할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미국이 20년 전 아프간에 들어간 것이 문제였나. 국가 건설 과정이 너무 과하거나 부족했나, 아니면 처음부터 불가능했나. 아프간 문화·역사에 대해서도 너무 무지했나. 이런 논의에서 한국은 성공적인 ‘국가 건설’ 모델로 자주 언급된다. 미군 주둔으로 수십 년간 안보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불완전하지만 성공적인 모델로도 거론된다.

아프가니스탄 시민들을 태운 버스가 지난달 27일 오후 임시 수용시설로 지정된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 도착한 가운데 한 아이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손인사 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아프가니스탄 시민들을 태운 버스가 지난달 27일 오후 임시 수용시설로 지정된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 도착한 가운데 한 아이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손인사 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미국의 상대적 쇠퇴와 신뢰도 하락, 동맹국들에 대한 미국의 책무와 관련된 인식도 자주 거론된다. ‘서울은 카불이 아니다’ ‘미국의 또 다른 영원한 전쟁터인 한국은 아프간 철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같은 제목의 글들은 “주한미군을 감축할 생각이 없다”라는 제이크 설리번 미 국가안보보좌관의 발언과 맞물려 있다. 한국 언론 보도를 접하면서 느낀 점은 미군 철수에 대한 우려가 한국보다는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대한 불안이 극심한 유럽에서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미국은 한국의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지난 20년 동안 우여곡절 속에서도 추진됐던 한국의 아프간 파병이 보여준 미국과의 보다 성숙한 파트너십과 ‘글로벌 미들파워’로 떠오르고 있는 한국의 존재감도 주목해야 한다.

2001년 9·11테러 이후, 김대중 정부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상황에서도 아프간에 공병 및 의료부대를 신속하게 파견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전에 의료지원단과 건설지원단을 보냈다. 이것도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어려운 결정이었다. 한국은 2008년 이라크 파병 임무가 평화적으로 종료되기 전까지 연합군 중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지원한 국가였다. 그러나 2007년 분당샘물교회 교인 23명이 선교활동을 하러 아프간에 갔다가 탈레반에 납치돼 2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미국 외교관으로서 납치된 민간인 구출과 더 많은 인질극을 조장할지 모를 위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했던 당시 한국 정부의 난처함에 공감했다. 결국 인질 석방은 성공했지만 그 여파로 한국 파병 인력 주둔지는 바그람 미군기지에 자리 잡았던 작은 한국병원으로 축소되었다. 2009년 한미 의제로 다시 아프간이 떠올랐고, 2010년 한국은 군인·경찰·구호요원들로 구성된 지방재건팀(PRT)을 파견하는 등 지원을 확대했다.

아프가니스탄은 계속 성장하고 있는 한국의 공적개발원조(ODA) 초창기 주요 수혜국이었다. 한국은 2002년 카불에 코이카(KOICA) 사무소를 개설하고 각종 위협과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지원활동을 이어갔다. 2013년에는 한국의 최대 양자간 원조수혜국이었다. 지난해 12월 한국의 나토 외무장관 회의 참석에서 보듯이 나토와 동반자 관계를 계속 확대하고 있는데 그 인연이 시작된 곳도 아프가니스탄이다.

2001년부터 나는 미국이 주도하는 아프간 재건 노력에 한국이 보여준 헌신을 지켜봐왔다. 세계적으로 부상하고 있는 한국의 자신감과 정체성, 급성장하는 소프트파워와 하드파워, 특히 중앙아시아에서의 인적 네트워크의 확대도 눈여겨봐왔다. 태권도가 아프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역대 올림픽에서 딴 유일한 메달 두 개가 이란에 있는 아프간 난민 수용소에서 태권도와 사랑에 빠진 선수에게 돌아갔다. 한국 정부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아프간인 구출과 그들이 한국에서 받은 따뜻한 환대도 인상적이었다. 한국이 앞으로도 아프간 국민들, 특히 여성과 소녀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