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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재준의 의학노트

친구 따라 강남 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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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임재준 서울대 의대교수 의학교육실장

임재준 서울대 의대교수 의학교육실장

중학교 때인가 한문 시간에 ‘근묵자흑 근주자적 (近墨者黑 近朱者赤) 이라는 경구를 배운 적이 있다. 먹을 가까이하면 검게 물들고 붉은색을 가까이하면 붉게 물드니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뜻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옛말 중 틀린 것이 거의 없지만, 이 교훈은 의학적으로도 꼭 맞는 말이다.

미국 보스턴 근교의 프래밍햄이라는 작은 도시는 유명하지는 않지만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곳이다. 1948년부터 남녀 각각 5209명을 오랫동안 자세히 관찰하여 심장병과 당뇨 등 여러 가지 질환의 위험인자가 무엇인지를 밝힌 ‘프래밍햄 연구’가 진행된 곳이기 때문이다. 비만이 당뇨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나 고혈압이 뇌경색의 발생을 늘린다는 의학 상식이 이 연구를 통해 처음 밝혀졌다. 최초 참여자들의 아들 세대는 물론 손자 세대까지 합류하여 연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옛말
건강 문제에도 잘 들어맞아
외로움은 면역에도 악영향
맘껏 친구 만날 날이 어서 오길

연구를 시작할 때부터 참여자들의 특성을 꼼꼼히 기록해두었기 때문에 여러 연구자들이 모인 자료들을 다양한 목적으로 재분석했다. 미국 하버드 의대의 니콜라스 크리스타키스 교수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프래밍햄 연구에 포함된 사람들 중 사회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 1만2067명을 분석하여 혹시 비만이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려고 했다. 다시 말하면 크리스타키스 교수는 가족이나 친구 중 뚱뚱한 사람이 있다면 내가 뚱뚱해질 확률도 높아지는 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연구팀은 1971년부터 2003년까지 32년 동안 연구 참여자들을 관찰한 결과를 분석했는데 결론은 아주 흥미로웠다. 남편이나 아내가 비만이라면 내가 비만이 될 위험성이 37% 높아졌다. 형제 중 뚱뚱한 사람이 있다면 내가 뚱뚱해질 확률이 40% 높아졌다. 혹시 뚱뚱한 친구가 있다면? 위험성이 57%나 높아졌다.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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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점은 친구 사이에 따라 결과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내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비만인 사람이 있다면 나도 비만해질 확률이 171%나 증가했다. 그런데 나를 자신의 친구라고 응답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비록 뚱뚱하더라도 내 몸무게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크리스타키스 교수는 후속 연구를 통해 금연 역시 가족과 친구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밝혔다. 배우자가 금연하면 내가 흡연할 가능성이 67% 줄었고, 형제가 금연하면 25% 줄었으며, 친구가 금연하면 34% 줄었다. 서로 친구라고 인정하는 사이라면 흡연 가능성이 43%로 더욱 줄어들었다. 그러나 내가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주위 사람의 금연은 내게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렇게 우리는 친구와 가족으로부터 좋고 나쁜 영향을 모두 받는다. 그렇지만 건강에 가장 좋지 않은 것은 역시 외롭게 사는 것이다. 외로운 사람들은 혈압도 높고, 잠도 잘 자지 못하며, 치매도 더 쉽게 생기고, 결국 수명도 짧아진다. 그리고 예방접종의 효과도 떨어질 수 있다.

미국 카네기-멜론 대학교 심리학과의 세라 프레스만 교수팀의 연구를 살펴보자. 연구진은 독감 예방접종 후 면역 반응이 사회적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신입생 83명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했다.

우선 학생들이 얼마나 외로운지 ‘UCLA 외로움 척도’를 이용하여 측정했다. 그리고 사회 관계망의 크기는 가장 가깝고 중요하여 그들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이름을 세 부류로 나누어 쓰는 방식으로 파악했다.

이후 연구진은 독감 예방접종을 하기 직전, 접종 한 달 후, 넉 달 후에 피를 뽑아 독감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의 양을 측정하여 외로움의 정도나 사회 관계망의 크기와 비교해보았다. 결과는 아주 명확했다. 더 외로울수록, 또 사회 관계망이 좁을수록 독감 예방접종 후 항체 형성이 확연히 낮았다. 즉, 친구 없이 외롭게 지내는 것은 면역 반응에도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학연구들이 보여주듯이 좋은 친구들과 교류하는 것은 우리 마음과 몸의 건강에 무척 중요하다. 그렇지만 수그러들지 않는 코로나19 때문에 우리는 두 해째 친구들을 쉽게 만나지 못하고 있다. 마음 맞는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는 즐거운 시간을 휴대폰 문자로 대신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마스크를 벗고 마음껏 친구들을 만나 그간의 안부를 묻고 밀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때가 어서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