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 돕는다” 역사의 교훈 재확인

중앙일보

입력 2021.09.02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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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아프간 사태가 소환한 베트남전

박태균의 역사와비평

박태균의 역사와비평

“우리는 우리의 관심 정도에 맞게 개별 국가에 대한 공약을 지켜야 한다. (중략) 우리의 이익을 기준으로 하여 상대적으로 순위를 매겨야 한다는 것이다. 약속이 쉽게 바뀌어서는 안 되지만, 불변성과 관성을 혼동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거나 약속을 분명히 지속할 수 없게 되면 올바른 결론을 내리고 그에 따라 정책을 변경해야 한다.”

남베트남 정부가 패망한 지 열흘이 지난 1975년 5월 9일 미 국무부 수석보좌관이 포드 대통령의 국가안보 보좌관에게 보낸 ‘베트남의 교훈’이라는 문서의 내용이다. 동맹 또는 협력 관계를 합의했다고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반세기 전 상대 오판한 미국, 과거에서 무엇을 배웠나
베트남 혁명세력 과소평가하고, 현지 민심도 읽지 못해
자신을 지킬 의지·능력 없으면 외부 지원도 효과 없어
한국도 5000여 젊은이 희생 … 지역학 연구 투자 늘려야

“앞으로 우리가 약속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장래 동맹국이 고유한 힘과 의지로 자신을 지킬 능력이 있는가이다. 우리가 지원한 베트남 정부는 적보다 훨씬 더 인도적이었지만, 완고하고 훈련된 적 앞에서 국민의 지원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없었다. 사실상 우리는 남베트남을 구하는 것이 남베트남 자신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하게 만들었다. (중략) 그들이 일할 수 없다면 우리도 그들을 대신할 수 없다.”

‘베트남에서의 미국 전쟁’으로 퇴색

1969년 아시아에서의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는 ‘닉슨 독트린’과 같은 내용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베트남인의 전쟁이 아니라 ‘베트남에서 미국의 전쟁’이 돼버렸다. 미국이 지원하는 정부가 스스로 지킬 의지와 능력이 없었기에 미국의 어떠한 노력도 통하지 않았다.

“우리는 일관되게 하노이(북베트남)의 집요함과 목적의식을 과소평가했고, 우리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 우리는 적에 대한 적절한 평가 없이 우리의 힘을 쏟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고, 그들의 목표 추구를 막을 수 없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문제를 짚었다. 우선 상대를 잘못 평가했고, 둘째로 자신을 과대평가했다는 점이다. 『손자병법』에서 전쟁 승리의 기본 공식으로 제기된 ‘지피지기(知彼知己)’가 안 됐다는 것이다. 그러니 백전불태(百戰不殆)가 아니라 백전백패가 돼버린 것이다.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에 대해서도 미국은 읽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중국과 베트남은 길항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조공외교로 평화로울 때도 있었지만, 직접적인 전쟁을 경험한 적도 적지 않았다. 베트남은 중국에 항상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 인접국인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가끔은 중국과의 전쟁도 마다치 않아야만 했다.

베트남 전쟁을 전후해서도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중국은 하노이가 추진한 1968년 평화협상을 반대했고, 1972년 닉슨 대통령을 초청했던 중국에 대한 베트남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개혁개방과 평화를 주창한 덩샤오핑 정부가 베트남 통일 후 4년도 되지 않은 1979년 2월 베트남을 침공했다. 키신저가 포드 대통령에게 전달한 5월 12일자 편지에는 유고의 티토 같은 독자노선의 지도자들이 있었음에도 공산주의자들을 ‘통’으로 잘못 평가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초록은 동색이 아니었다.

중국-베트남 관계 이해 못 한 미국

그런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베트남이 공산화할 경우 도미노 현상을 통해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중국의 영향력 아래서 공산화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개입했던 1964년, 중국은 핵실험에 성공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한 미국에 가장 무서운 것은 중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이었다.

미국 정부가 취했던 전술 중 가장 특이했던 것은 당시 분단선이었던 북위 17도선 이북으로 지상군이 올라가지 않는 전략이었다. 미군은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의 개입으로 방어선이 붕괴한 경험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과 호찌민 루트에 대한 폭격은 있었지만, 지상군이 직접 북베트남으로 진격하지는 않았다. 3·8선 이북으로의 북진 이후 중국군이 개입했던 경험을 떠올린 것이다. 진격 목표를 잃은 미 지상군은 영화 ‘플래툰’이나 ‘풀 메탈 자켓’에 나오는 최악의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또 다른 착각은 남베트남 정부가 남한 정부처럼 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개입하는 지역에 대한 지식이 없거나, 있어도 작동하지 않았다.

“우리는 외국 사회의 정치적 역학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를 인정해야 한다. 베트남에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정치 상황을 관찰했으며, 기본적으로 서구적 관점에서 판단을 내렸다. 베트남과 같은 국가의 정치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정치세력을 조작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중략) 특히 편향된 정보와 분석을 경계해야 합니다.”

미국은 베트남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도 읽지 못했다.

“광범위하고 뿌리 깊으면서 대중적 지지를 받는 혁명 운동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중략) 그런 사회에서는 식민주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고, 다양한 정도의 외부 착취와 민족주의에 대한 혁명적 호소가 계속 작동하고 있다. 베트남에서 우리는 프랑스 식민 지배의 계승자로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수의 전투병을 보낸 국가였다. 1972년에는 베트남에 있는 한국군의 수가 미군의 수보다 많았다. 다행히 1973년 평화협정이 발효됐을 때 대부분의 한국군과 교민들이 철수하여 사이공 함락 당시의 피해가 크지는 않았다.

참전국으로서 한국 정부도 1975년 4월 29일 담화를 발표했다. 남베트남 패망뿐만 아니라 김일성의 중국 방문으로 위기가 고조돼 있을 때였다. 담화 내용의 핵심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남베트남 상황을 본다면 분명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내용이 담기지 않았다.

미국 다음으로 많이 파병한 한국

우선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국군이 지키고자 했던 남베트남 정부가 무너졌다. 그 과정에서 5000명이 넘는 청년들이 희생됐다. 미국의 가장 가까운 우방인 영국이나 프랑스도 참전하지 않았던 전쟁에 희생당한 청년들을 애도하고 사과했어야 했다. 그리고 남베트남 정부와는 달리 국민이 지키고 싶은 정부를 만들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답은 긴급조치 9호였고, 그 끝은 10·26 사건이었다.

1980년대는 격동의 시기였다. 참전 군인과 유족들에 대한 보상과 보살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베트남 전쟁의 교훈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상황이 베트남 전쟁을 다시 소환하고 있다. 만약 미국 정부에서 ‘아프가니스탄의 교훈’이라는 문서가 나온다면 1975년에 나온 ‘베트남의 교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냉전이 무너진 1980년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베트남의 교훈을 망각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대한민국은 앞으로 해외에서 많은 역할을 요구받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계기로 과거로부터 제대로 된 교훈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세계 각국과 각 지역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철저하게 갖춘 지역학에 투자함으로써 국가의 미래전략을 탄탄하게 다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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