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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인권 대통령이 유엔의 인권 침해 지적받는 모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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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유엔 "언론중재법, 표현 자유 심각히 침해"  

대북전단금지법 등 인권 우려 끊이지 않아  

언론중재법 개정안과 관련해 아이린 칸 유엔 인권특별보고관 명의로 한국 정부에 보낸 우려 서한의 일부.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홈페이지]

언론중재법 개정안과 관련해 아이린 칸 유엔 인권특별보고관 명의로 한국 정부에 보낸 우려 서한의 일부.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홈페이지]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가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한국 정부에 보낸 서한에서다. OHCHR은 법안이 수정 없이 통과되면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의 표현 자유가 현격히 제한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언론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려는 법이라지만 이대로면 정반대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독소 조항인 고의·중과실 추정, 최대 5배 손해배상 등에 대해서도 매우 모호하며, 언론의 자체 검열을 초래할 것이라고 염려했다.

유엔 기구의 서한은 ‘언론징벌법’ 문제가 국제적 사안이 됐음을 보여준다. 이번 서한은 국내 인권단체 전환기정의워킹그룹이 지난달 24일 진정서를 보낸 데 따른 것이다. A4 용지 네 장 분량에 담긴 아이린 칸 유엔 인권특별보고관의 지적은 강도가 세다. 칸 보고관은 한국도 가입한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CCPR)’이 정부에 의사·표현의 자유를 보호할 의무를 부여한다는 점을 서한에 명시했다. 특히 가짜뉴스 금지라는 취지만으로 표현의 자유 제한이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밝힌 대목은 민주당의 판단이 국제 기준과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 보여준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후 유엔으로부터 23차례에 걸쳐 인권 상황 관련 서한을 전달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외교부 자료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 때 12건, 박근혜 정부 때는 13건이었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나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등 과거 정부 사건 일부가 현 정부로 넘어온 것을 감안하더라도 인권 관련 서한이 줄어들지 않았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화 이력을 내세워 온 여당은 유엔으로부터 인권 관련 우려를 전달받은 것을 뼈아프게 여겨야 한다.

OHCHR의 서한이 법적 구속력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정부가 유엔 기구의 지적에 대해 아전인수식 답변을 하며 넘어가려 해선 곤란하다. 민주당은 지난 4월 야당의 반대를 무시하고 대북전단금지법을 강행 처리하다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으로부터 서한을 받았다. 해당 법안이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인권 운동가들의 합법적 활동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였다. 정부는 접경 지역 주민들의 안전을 내세우면서 “표현의 수단만 최소한으로 제한한 것이지 본질적 내용은 제한하지 않았다”는 답변을 보냈다. 하지만 OHCHR 측은 당장 국제인권규약에 정보의 전파 방식도 보호토록 돼 있다고 재차 비판했다.

당 지도부 스스로 “국제적인 문제가 됐다”고 의원들에게 말한 만큼 민주당은 언론징벌법 처리를 한 달 미뤘을 뿐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여야가 법 개정을 논의할 ‘8인 협의체’ 참가 의원을 정하긴 했지만, 유엔 측이 지적한 독소 조항을 담은 해당 법안은 숙의가 아니라 폐기돼야 마땅하다. 유엔까지 지적한 문제 법안을 통과시켰다가는 ‘인권을 침해한 대통령과 정부’라는 오명을 쓰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