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역사’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유해 찾았다

중앙일보

입력 2021.09.02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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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 등의 유해가 사후 230년 만에 발견됐다고 1일 천주교 전주교구가 밝혔다.  발굴 과정에서 확인된 순교자 유골. [사진 천주교 전주교구]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 등의 유해가 사후 230년 만에 발견됐다고 1일 천주교 전주교구가 밝혔다.  발굴 과정에서 확인된 순교자 유골. [사진 천주교 전주교구]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尹持忠·1759~1791), 권상연(權尙然·1751~1791)의 유해가 신해박해 때 처형된 지 230년 만에 발견됐다. 윤지충의 동생으로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윤지헌(尹持憲·1764~1801)의 유해도 함께 확인됐다. 그간 무덤이 있다는 건 알려졌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했다.

천주교 전주교구는 1일 기자회견을 열고 “세 분의 유해에 대한 해부학적·고고학적 정밀 감식을 요청했고, 연구 결과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유해로 판명됐다”며 “이 유해들이 세 분의 유해라고 선언하며 이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배척한다”고 밝혔다.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을 보내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놀라운 선물을 베푸셨다. 유해발견은 놀라운 기념비적 사건”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순교자들의 피를 밑거름 삼아 성장해온 우리 교회가 순교역사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는 분들의 유해를 비로소 찾았기 때문”이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바우배기 일대에서 순교자의 유해를 발굴하고 있는 모습. [사진 천주교 전주교구]

바우배기 일대에서 순교자의 유해를 발굴하고 있는 모습. [사진 천주교 전주교구]

이들 유해는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는 초남이성지의 바우배기 일대에서 발견됐다. 전주교구는 “지난 3월 11일 초남이성지 바우배기 일대를 정비하다 순교자로 추정되는 유해와 유물이 출토됐다. 5호 무덤과 3호 무덤에서 출토된 백자사발지석의 명문을 판독하면서 한국의 첫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5호)와 권상연 야고보(3호)에 대한 기록을 확인했다. 8호 무덤에서는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유해를 찾았다”고 말했다. 지석(誌石)은 죽은 사람의 이름, 생몰 연월일, 행적, 무덤의 좌향 등을 적어 무덤에 함께 묻는 것으로 사발 등을 사용했다.

초남이성지를 담당하는 김성봉 신부는 “묘소의 정밀조사 및 출토물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묘지의 조성 연대와 출토물의 연대가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순교한 1791년과 부합하고, 무덤에서 출토된 백자사발지석의 명문 내용이 윤지충과 권상연의 인적 사항과 각각 일치함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두 유해에 대해서는 성별 검사 치아와 골화도를 통한 연령 검사 및 해부학적 조사, Y염색체 부계 확인검사(Y-STR)를 통해 윤지충과 권상연의 유해가 확실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유해 분석 과정에서 목뼈 및 양쪽 위팔뼈, 왼쪽 대퇴골에서 날카로운 도구로 자른 ‘예기손상’이 확인됐는데 천주교구는 이를 각각 참수와 능지처사형의 흔적이라고 제시했다.

바우배기 일대에서 발굴된 유해들의 위치가 그려져 있다. [사진 천주교 전주교구]

바우배기 일대에서 발굴된 유해들의 위치가 그려져 있다. [사진 천주교 전주교구]

세 복자의 유해가 발견된 곳은 또 다른 복자 유항검 아우그스티노 가족이 1914년 치명자산성지로 이전하기 전까지 묻혀 있던 곳이다.

윤지충 바오로는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해 1783년 진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 무렵 고종사촌인 정약용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됐다. 이듬해에는 스스로 교회 서적을 구해서 읽었으며, 3년간 교리 공부를 한 끝에 1787년 인척인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천주교인이 된 윤지충은 어머니와 동생, 외종사촌인 권상연에게도 교리를 가르쳤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했다.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의 동상.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의 동상.

권상연은 1751년 진산의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윤지충을 통해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 기존 학문을 버리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1790년에는 중국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렸다.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고자, 집 안에 있던 신주(죽은 사람의 위패)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어머니가 사망하자 윤지충은 유언에 따라 천주교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유교가 지배했던 조선 사회에서는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행위로 비쳤다.

신주를 불사르고 유교식 예법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체포령 소식을 들은 윤지충과 권상연은 피신했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그들 대신 윤지충의 숙부를 감금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윤지충과 권상연은 피신처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했다. 진산 군수는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릴 것을 권유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천주교가 진리라며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고 대답했다. 수차례 설득과 회유에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윤지충과 권상연은 문초를 당하면서도, 자신들이 아는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 오히려 윤지충은 제사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했고, 혹독한 형벌이 가해지기도 했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한 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조정은 윤지충과 권상연을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했다. 각각 32세 40세 였다.  참수된 지 9일 만에 교우들은 허락을 받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교우들이 여러 장의 손수건에 순교자의 피를 적셨고,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도 보냈다고 한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을 때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윤지충은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천주교회가 공경할만한 복된 자로 선포하는 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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