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제철이 1일 현대ITC(당진)·현대ISC(인천)·현대IMC(포항) 등 3개의 자회사를 출범시킨다. 사내 협력업체에서 일하던 비정규직 근로자 7000여명을 자회사를 통해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하기 위한 비상 조치다. 정부가 2월 불법 파견 시정 명령을 내린 데 대한 고육지책이지만 현대제철은 기존 정규직의 반대와 자회사 직고용을 거부하는 비정규직의 파업 등이 겹쳐 극심한 분란에 휩싸였다. 이에 따라 인천국제공항공사같은 공기업에서 벌어졌던 파견직 정규직화를 둘러싼 노노·노사 갈등이 외주화 비율이 높은 철강과 조선, 자동차 등 민간기업으로 확산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부는 갈등 조정 회피" 비판
"파견법 개정 안하면 반복돼"
철강·조선·자동차 확산 우려
자회사 통해 협력업체 직원 직적 고용
민주노총 금속노조 현대제철 비정규직지회는 31일 당진제철소 정문 앞에서 집회를 열고 본사의 직접 고용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였다. 현대제철은 새로 설립한 3개의 자회사를 통해 협력업체 비정규직 4500여명을 고용했다. 이미 채용절차를 끝내고 담당 업무 배치도 마쳤다. 하지만 이들과 별개로 비정규직지회 소속 2500여명은 3개 자회사의 채용에 응하지 않고 현대제철 본사의 직접 고용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제철소 운영의 핵심 건물인 통제센터를 불법으로 점거해 업무 마비 상황"이라며 "협력사 노조의 파업과 시설물 불법 점거로 제철소도 정상 가동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대제철의 노사 갈등이 시작된 건 지난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용노동부가 현대제철에 불법 파견 시정 명령을 내리면서다. 이에 앞서 국가인권위원회는 2019년 1월 현대제철의 사내 하도급 근로자를 복리후생 등에서 차별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현대제철은 지난 7월 자회사를 설립해 협력업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방안을 내놨다. 본사 정규직의 60% 수준이던 임금을 자회사 정직원이 되면 80% 수준까지 올리고 각종 복리후생은 현대차그룹 계열사와 동일하게 적용하는 조건이다.
기존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노 갈등 비화
현대제철이 자회사를 설립한 건 "정규직의 70%에 이르는 비정규직을 한꺼번에 채용하는 건 부담"이라는 이유에서다. 현대제철 본사는 6월말 기준 직접 고용하고 있는 정규직이 1만912명이다. 하지만 현대제철 조치에 공채를 통해 입사한 정규직들이 반발하면서 노노갈등이 불거졌다. 현대제철 안팎에서는 이번 갈등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조 사이에 가벼운 몸싸움이 발생하기도 했다.
비정규직지회 소속 협력업체 직원들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며 본사의 정규직 직접고용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들 중 순천공장 근로자 160여명은 사측을 상대로 불법파견 소송을 제기해 2심에서 승소하기도 했다. 또 당진공장 근로자들이 2016년 낸 불법 파견 소송의 1심 결과도 내년 초에 나올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법원에서 이들이 최종 승소 판결을 받으면 본사 직접 고용 주장은 더욱 힘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현대제철 측은 “고용노동부가 자회사를 설립해 채용하는 것도 정규직화의 한 방편으로 인정하고 있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정규직화 갈등 공사→민간기업으로 확대
재계에선 현대제철 사태로 민간 기업에서도 정규직화 갈등을 둘러싼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고 우려한다. 현대제철이나 포스코 같은 철강, 현대차와 기아, 한국GM같은 자동차, 현대중공업같은 조선업계 등에서 똑같은 갈등이 벌어질 것이란 전망이다. 모두 외주화 비율이 높은 업종이기 때문이다.
경제단체 관계자는 “공기업에서 시작된 정규직화 갈등이 산업계 전반에 확산될 것"이라며 "정부가 불을 질러놓고 갈등 조정은 커녕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인천국제공항공사에서는 지난해 6월 보안요원 1902명에 대한 본사 직고용을 통한 정규직 전환 방침을 발표했지만 노조 반발로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노사가 논의해야 할 사안”이라는 원칙론만 반복해 왔다. 그사이 노사 및 노노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정부를 상대로 직고용을 요구하고 있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상담사가 대표적이다.
"파견법 바꾸지 않으면 갈등 반복" 우려
노동법 전문가들은 현대제철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파견법에 있다고 분석했다. 익명을 요구한 노동법 전문가는 “인천국제공항공사 보안요원 업무는 공사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어 적법한 도급으로 볼 수 있다"며 "하지만 현대제철 정규직화 요구는 파견법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서로 결이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현행 파견법에선 같은 종류의 업무 또는 유사한 업무를 수행하는 근로자에 대해 차별적 처우를 해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대제철 순천공장 비정규직 노조원들이 승소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고용부 가이드라인을 따라 현대제철처럼 자회사를 설립해도 파견법을 개정하지 않는 한 갈등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고등법원은 SK텔레콤이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신사업을 추진하면서 자회사인 SK플래닛 직원을 전출 받은 건 불법파견이라고 2019년 판결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파견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비슷한 갈등이 반복될 수밖에 없고 기업의 부담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4차 산업 혁명 등 산업 구조 전환에 맞춰 노사와 정치권이 풀어가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