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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북한의 압박술 ‘전략적 모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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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문재인 정부를 향한 북한의 압박술은 ‘전략적 모욕’으로 부를 수 있다. 북한이 틈만 나면 구사하는 대남 언어가 ‘모욕’이고, 이는 감정적으로 흥분한 상태를 드러내는 게 아니라 모욕을 가해 북한이 의도하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전략적’이다.

북한의 전략적 모욕은 환대와 비난의 교차 구사술이다. 대체로 선(先) 환대, 후(後) 모욕 수순이다. 먼저 남측의 제안에 응해 대화에 나와 화기애애한 장면을 보여준 뒤 이면에선 북한의 진짜 요구 사항을 꺼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얼굴색을 바꿔 정치적·인격적으로 모독을 주는 것이다. 대화와 모욕이 반복되는 난장 상황에서 북한은 어느새 협상의 의제나 조건을 바꾸곤 한다.

대남 기본원칙은 오직 체제 이익
‘포옹과 쌍욕’ 두 얼굴 신경 안써
모욕 일삼으며 한국의 분열 노려
북에 대한 감상주의 접근은 허망

예컨대 트럼프 행정부 시절 한·미 연합훈련 연기는 북·미 비핵화 협상을 지원하기 위해 이뤄졌다. 그런데 북한이 지난달 10일 남북 통신선을 다시 끊으면서 요구했던 게 연합훈련 중단 및 주한미군 철수(김여정 담화)였다. 즉 ‘북·미 비핵화 협상용=연합훈련 연기’에서 ‘남북 대화용=연합훈련 중단 및 주한미군 철수’로 바뀌었다. 연합훈련 연기라는 비핵화 협상용 당근을 북한은 남북 대화용으로 격하시켰고, 동시에 주한미군 철수를 더 얹어 요구 조건을 격상했다. 그간 ‘삶은 소대가리가 웃을 일’ ‘특등 머저리’와 같은 욕설을 집요하게 쏟아낸 뒤 벌어진 일이다.

서소문포럼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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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욕설 조어력은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중국이 직설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으며 이른바 전랑외교(戰狼外交)를 구사하고 있지만 북한에는 결코 미치지 못한다.

북한의 전략적 모욕은 문재인 정부만 겨냥했던 게 아니다.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명박 역도’라고 했고 박 전 대통령을 향해선 노동신문 지면으로 ‘암개(암캐)’라고 욕을 했다. 어디 한국 대통령뿐이랴. 북한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향해 먼지를 털어 찾아낸 욕설이 ‘도터드(dotard·노망난 늙은이)’였다.

하지만 전략적 모욕으로 인한 난감함의 정도는 정권마다 다르다. 북한을 상대한 걸 집권 업적으로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북한의 변검술에 대응하기가 마땅치 않다. 손 한 번 잡아본 일이 없이 마음을 주지 않은 상대라면 욕지거리가 나와도 가던 길 가면 된다. 반면 남북 간 악수와 합의 성과를 부각해 국내외에 타전됐는데 욕설이 뒤따르면 곤혹스럽다. 욕설에 분노로 맞대응하면 그간 북한을 상대로 모래성을 쌓고 있었다고 자인하는 꼴이 된다.

반대로 침묵하고 있어도 국내외에서 난감한 처지에 놓인다. “북한 욕설엔 입도 뻥긋 못하고 일본엔 뻥뻥 큰소리를 친다”는 조롱을 듣는다. 사실 북한이 노리는 게 이같은 국내 정치적 타격이다. 정치적으로 곤혹스럽게 만들어 북한이 원하는 방향으로 남한 정부가 한발이라도 떼게 하려는 게 북한의 목표다. 남한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이 정부의 열혈 지지층이 온라인 여론몰이로 비난하고 조롱해서 입을 막고 뭉개려 할 수 있겠지만 북한은 그럴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북한의 전략적 모욕은 북한 대남 외교술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 북한은 철저하게 이익지향적이다. 북한에, 정확하게는 김정은 정권에 도움이 된다면 욕설이건 포옹이건 개의치 않는다. 군사분계선 앞에서 손을 잡았다 해도, 도보다리에서 속내를 드러내는 인간적 얘기를 나눴다 해도 언제든 얼굴을 바꿀 수 있다. 김정은 체제에 도움이 된다면 쌍욕이건, 서명이건 모두 가능한 게 북한이다. 포옹의 기억에 취해 있는 한 북한의 도발에 뒤통수를 맞곤 한다.

또 북한의 전략적 모욕은 대북 감상주의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적나라하게 알려준다. 남북이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건너는 ‘아름다운’ 장면의 이면엔 생존을 위해선 남북 공멸까지 불사할 수 있는 처절한 북한 체제가 있다는 걸 북한의 욕설이 일깨워준다. 지금 여야가 함께 사는 남한 땅에서도 여야 간 정치적 타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동안 집권 세력은 적폐 청산의 깃발만 흔들었다. 그런데 남한과 체제가 다른 북한이 단지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남한과 손을 잡을 거라 기대하는 자체가 난센스다. 남한이 남한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평양은 평양 정권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게 북한발 욕설이다.

남북 관계는 진전돼야 하고 대화는 진행돼야 하며 제로섬 대결 구도에서도 남북의 공동 이익을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이 ‘백두에서 한라까지’를 함께 외치며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적인 모습은 결코 아니다. 청와대·정부가 보도자료, 브리핑에 장밋빛 남북 관계를 내놓을 때 이는 현실보다는 가상현실에 더 가깝다는 걸 일깨워주는 게 북한의 모욕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