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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힘으로 최정 눌렀다, 조승아 새 물결 예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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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여자바둑의 아이콘 최정 9단이 꺾였다. 지난주 열린 2021 삼성화재배 예선 여자조 결승전에서 신예 조승아 4단이 최정을 꺾고 여자기사에게 주어지는 단 한장의 본선 티켓을 차지한 것이다.

충격이었다. 랭킹 1위 최정은 여자바둑에선 무적이다. 랭킹 2위의 오유진, 3위의 김채영이 최정에게 줄기차게 도전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세계로 무대를 넓혀도 유일한 적수라 할 중국의 위즈잉을 연달아 제치면서 최정은 무풍지대를 걷는 듯했다.

최정은 오히려 남자 세계를 응시하며 보폭을 키워나갔다. 삼성화재배에선 세계챔프 스웨 등을 꺾었고 LG배에선 중국 2위 구쯔하오 등을 격파하며 이름을 떨쳤다.

팬들은 과거 조훈현-이창호를 연파하고 국수전에서 우승했던 ‘루이나이웨이 신화’ 그 이상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 최정이 아직 한 번도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한 23세의 조승아 4단에게 패배한 것이다.

제아무리 최정이라 해도 어쩌다 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승부는 느낌이 달랐다. 조승아는 그동안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올해 들어 급상승했다. 7월에는 17연승을 기록했고 젊은 남자 유망주들을 연파했으며 현재는 전체 기사 중 승률1위(83%)를 기록하고 있다.

최정은 국내 랭킹 17위로 여자기사로는 유일하게 100위 안에서 활동하는 기사다. 조승아는 118위(여자랭킹 4위). 외관만 보면 체급이 다르다는 게 맞다. 이번 조승아의 승리도 최정에게 7연패를 당한 끝에 처음 거둔 승리다.

조승아는 “큰 승부인 데다 상대가 최정 9단이라 기대하지 않고 두었는데 막상 이기자 당황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승부가 심상치 않게 다가온다. 결승전은 치열했다. 특히 전투에 능하고 힘이 강한 최정에게 조승아가 같이 힘으로 맞서며 타개해내는 과정이 놀라웠다. 그 치열함은 조승아라는 신예가 여자바둑에 거센 물결을 몰고 올 것 같은 예감을 준다.

조승아는 어려서부터 유망주로 꼽혔으나 18세 때 늦은 입단을 했다. 프로에 와서도 바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5년차인 올해 변화가 일어났다. 17연승과 승률 1위 외에도 2021 NH여자바둑리그에서 서귀포칠십리 팀 주장으로 참여해 정규시즌에서 13승 1패를 기록하며 팀을 2위에 올렸다. 물론 그 1패도 최정에게 당한 것이다(보령머드의 최정은 14전 14승).

최정은 그동안 외로웠다고 볼 수 있다. 여자바둑은 상대가 없고 남자바둑은 벽이 높았다. 그래서 잠시 주춤하고 있지만 최정은 여전히 최강이다. 조승아가 좀 더 성장해 최정과 막상막하의 승부를 펼칠 수 있다면 두 사람은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조승아는 AI 이전보다 요즘 공부를 더 많이 한다. “공부량이 중요해졌다”고 그는 말한다. 웬만한 AI 포진은 꼭 외워야 하고 그 외우기를 통해 응용을 체득해야 한다. 전엔 공부를 해도 막막했지만 AI 등장 이후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보탬이 된다. 그래서 코로나 이후 집에서 공부를 많이 하면서 자꾸 이기게 됐고 이젠 누구를 만나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2021 삼성화재배 예선전은 코로나 때문에 각 나라별로 치러졌다. 국내 시니어조에선 이창호 9단이 유창혁 9단을 꺾고 2년 연속 선발됐고 일반조에선 이동훈·안성준·윤찬희 9단, 김승재·이창석 8단, 한승주 7단, 설현준 6단 등 7명이 예선의 관문을 뚫었다.

신진서·박정환·신민준·변상일·김지석 9단은 시드. 이들을 포함한 세계 32강은10월 20일부터 2주간 세계바둑 최고의 영예인 삼성화재배 챔피언 자리를 놓고 격돌한다. 조승아 4단도 당당히 이중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인데 그의 소망은 소박했다. “한판만 이겨도 만족한다.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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