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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가락질 할 때도 박자 쪼개기 훈련, 리듬 못타는 몸치 탈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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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연주는 감각적 리듬이 특징이다. 하지만 그는 “리듬감각은 나의 재능 중 가장 후천적인 것”이라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연주는 감각적 리듬이 특징이다. 하지만 그는 “리듬감각은 나의 재능 중 가장 후천적인 것”이라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러시아 작곡가 니콜라이 카푸스틴(1937~2020)의 연습곡(작품번호 40)은 까다로운 리듬의 연속이다. 절뚝거리는 듯한 부점(附點), 길고 짧은 음표의 교차, 빠르게 반복되는 짧은 음 같은 것들이 규칙과 불규칙을 오가며 등장한다.

피아니스트 손열음(35)은 카푸스틴의 작품만 모아 음반을 냈다. 연습곡 8곡으로 시작해 피아노 소나타 2번으로 끝나는 앨범이다. 클래식 음악의 전통적 리듬은 물론 재즈의 블루스, 스윙, 래그타임, 부기우기까지 들어가 있어 리듬 감각 콘테스트 같은 작품들이다. 손열음은 모든 곡에서 강렬한 리듬을 표현했다. 정확한 리듬·박자, 그리고 숫자로 재단하기 힘든 그루브까지 갖춘 연주다.

타고난 리듬 감각을 자랑하는 듯한 음반이다. 하지만 손열음은 “리듬 타는 일은 나의 다른 재능에 비해 부족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최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만난 그는 “밥 먹을 때 젓가락으로도 리듬을 훈련했다. 집중적 노력으로 리듬을 타게 됐고, 음악적 성격도 바뀌었다”고 털어놨다.

음(音)에 대한 그의 재능은 잘 알려져 있다. 손열음은 자연의 소리, 도로 위 사이렌의 음정을 맞힐 정도의 절대 음감이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로 훈련하지 않았으면 음감도 발전하지 않았을 것”라면서도 “음감 때문에 답답한 적은 적어도 없었다”고 했다.

손열음 카푸스틴 음반.

손열음 카푸스틴 음반.

리듬은 상대적으로 답답한 부분이었다. “박자를 못 세거나, 리듬을 놓치는 박치·리듬치는 분명 아니었다. 그런데 리듬 타는 일, 또 듣는 사람이 춤출 수 있게 하는 일이 어려웠다.” 손열음은 “‘몸치’였다는 표현이 정확하다”고 덧붙였다.

그가 어려워했던 리듬은 뜻밖에도 클래식의 전통적 영역에 있었다. 듣는 사람은 복잡한 리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쇼팽·슈만 같은 작곡가의 작품에서 손열음은 리듬 감각의 한계를 느꼈다. “(영재 입학으로) 대학생이 됐던 16세 즈음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을 집중적으로 했는데 리듬이 어려웠다. 리듬은 맞추는 게 아니고 타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됐다.” 기본 박으로 흘러가는 음악에서 리듬으로 굴곡을 만드는 일이 생각만큼 되지 않았다고 했다.

내성적 성격도 한몫했다. 아는 사람을 만날까 봐 큰길 대신 외진 길로 다녔던 그다. 손열음은 “감정을 바로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어서 음악에 맞춰 몸을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리듬을 표현하는 일이 어색했다”고 말했다.

10대 후반에 ‘몸치 극복’ 노력이 시작됐다. “피아노 연습할 때 말고 평상시에도 리듬을 떠올리며 박을 자꾸 쪼개봤다. 하나를 둘·셋으로, 그렇게 쪼갠 박을 여러 조합으로 붙여서, 그다음에는 다르게 쪼개서 붙여봤다.” 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이었다. 리듬 연습은 식사 시간에도 이어졌다. “젓가락 들고도 박자 쪼개는 연습을 했다. 어디서든 온종일 했다.”

성격도 변화해야 했다. 길거리에서 음악이 나오면 몸을 흔들어보고, 옆에 누가 있어도 콧노래를 불러보고, 그러면서도 쭈뼛거리지 않는 연습을 계속했다고 한다.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시작했지만, 어떻게 보면 ‘자아 찾기’에 가까운 여정이었다.”

오로지 리듬만 생각하며 1년쯤 보냈다. 손열음은 “어떤 물꼬가 터져 갑자기 리듬이 됐던 건 아니다. 계속 쌓였다”고 했다. 조지 거슈인 등 재즈 리듬을 많이 가져다 쓴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면서부터는 재즈 피아니스트를 찾아가 레슨도 받았다. “클래식 음악과는 전혀 다른 어법이었다. 잘못해서 클래식 음악의 리듬이 나오면 완전히 큰일 나는 세상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서로 다른 세계들의 리듬을 몸으로 익히게 됐다.

카푸스틴은 그런 와중에 찾은 ‘리듬의 작곡가’다. “독일에서 한 친구가 카푸스틴을 들려줬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하이브리드일 수 있구나 했고, 그런 와중에도 클래식 음악의 정수가 들려 흥미로웠다.” 손열음은 2011년 러시아의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본선 2차 무대에서 카푸스틴의 변주곡(작품번호 41)을 연주했다. 손열음은 “콩쿠르 청중이 웅성웅성하며 ‘저게 무슨 곡이냐’하는 게 무대에서 들렸을 정도”라며 “연주 후에 러시아 관객들이 찾아와 ‘미국 작곡가냐?’고 물었다”고 기억했다. 카푸스틴은 러시아의 명문인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작곡은 독학해 재즈를 비롯한 여러 어법을 품은 작곡가였다. 최근 들어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들이 그의 작품을 발굴해 연주하고 있는데, 손열음이 그 선두에 있다.

이 대회에서 2위에 오른 후 손열음은 카푸스틴과 각별한 사이가 됐다. 카푸스틴은 손열음이 러시아에서 공연할 때마다 챙겨 듣고 e메일을 주고받았다. 손열음은 지난해 7월 타계한 카푸스틴 1주기에 맞춰 음반을 냈다. 9월 30일과 10월 1일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카푸스틴을 중심으로 독주회를 연다. 타고난 듯하나 사실은 노력으로 완성된, 손열음의 리듬 감각을 확인할 수 있다. 손열음은 “다른 재능에 비해 리듬감은 ‘어떻게 얻었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을 정도로 내 의지가 개입됐다”며 “리듬을 탈 수 있어 무척 행복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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