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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삼성이 준 7000억원…"결국 배탈이 날 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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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정기현 국립중앙의료원장(맨 오른쪽)과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오른쪽에서 두 번째), 정은경 질병관리청장(맨 왼쪽)은 지난 5월 국립중앙의료원 연구동 대회의실에서 이건희 기부금 수여식 행사를 했다. 이로부터 불과 3개월만에 기부금 7000억원을 둘러싸고 부처간 잡음이 흘러나온다. [중앙포토]

정기현 국립중앙의료원장(맨 오른쪽)과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오른쪽에서 두 번째), 정은경 질병관리청장(맨 왼쪽)은 지난 5월 국립중앙의료원 연구동 대회의실에서 이건희 기부금 수여식 행사를 했다. 이로부터 불과 3개월만에 기부금 7000억원을 둘러싸고 부처간 잡음이 흘러나온다. [중앙포토]

"다시 기대하기 어려운 큰돈이 들어왔다. (진행되는 모양새를 보니) 솔직히 아까워 죽겠다. 결국 배탈이 날 거다. "

지난 4월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유족들이 국립중앙의료원(NMC)에 기부한 7000억원(5000억원은 병원 건립, 2000억원은 연구개발로 지정)과 관련해 최근 잡음이 새어 나오자 질병관리본부장을 지낸 정기석 한림대성심병원 교수가 걱정스레 내뱉은 말이다. 현금 7000억원이 NMC 계좌에 들어온지 3개월이 지났지만, 유족 측이 요구한 세계 최고 수준의 감염병 전문병원 신축이나 감염병 연구개발을 위한 발전적 논의를 시작하기는커녕 돈의 주도권을 놓고 정부 부처와 NMC 사이에 신경전만 오가고 있어서다.

"불나방처럼 달라붙고" 

포문은 정기현 NMC 원장이 열었다. 정 원장은 지난 24일 더불어민주당이 주최한 '공공 보건의료 강화를 위한 국회 심포지엄'에 참석해 예산을 담당하는 기획재정부와 감염병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 모두를 싸잡아 비판했다.
"온갖 이해 관계자들이 불나방처럼 달라붙고 기재부는 자기 돈인 양 검증하겠다고 나서는데 복지부의 정책 의지는 실종된 상태다. 지금은 행정이 의료를 압도해서 의학적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대로 중앙감염병 전문병원이 설립된다면 그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건물 하나에 그치게 될 것이다. 하루빨리 감염병 병원을 만들겠다던 약속은 어느덧 휴짓조각이 됐다. "

정기현 국립중앙의료원장은 국회 심포지엄에 참석해 기재부와 복지부를 싸잡아 비판했다. 연합뉴스

정기현 국립중앙의료원장은 국회 심포지엄에 참석해 기재부와 복지부를 싸잡아 비판했다. 연합뉴스

NMC는 기부금을 제대로 쓰려 노력하는데 기재부·복지부가 돈 욕심이든 규제 본능이든 뭐든 간에 불필요한 숟가락을 얹는 바람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주장이다. 복지부 산하 기관장이 여당 주최 공식 행사에서 정부를 향해 이같은 강경 발언을 쏟아내는 건 매우 이례적이라,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의료계 안팎에선 "7000억원을 둘러싼 주도권 다툼"이 최근 불거진 소음의 본질이라는 뒷말까지 나온다.

기재부 예산 삭감에 불만

정 원장이 제기하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기재부의 예산 삭감, 다른 하나는 복지부의 시간 끌기다.
우선 기재부는 내년도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NMC가 요구한 신축 건물 설계 예산 등 12억 5000만원을 삭감했다. 당초 정부는 2026년 개원을 목표로 한 100병상 규모의 중앙감염병병원 신축을 위해 1294억원의 예산을 책정한 바 있다. 이후 이건희 유족이 병원 건립에 쓰라며 5000억원을 내놓자 이를 150병상으로 키웠고, 총사업비가 많이 늘어난 만큼 사업계획 적정성 검토를 거쳐 설계비를 다시 책정해야 한다는 논리로 예산을 삭감했다. "정부 사업은 기부금 규모와 무관하게 예산이 배정돼야 시작할 수 있다"(정기석 교수)는 의견도 있지만, 아무리 NMC 통장에 들어온 돈이라 해도 추후 세금으로 들어갈 운영비 등을 고려하면 기재부가 돈의 쓰임새를 챙기는 걸 문제 삼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정 원장은 "기재부가 자기 돈인 양 검증하겠다고 나선다"는 식의 원색적 비난을 했고, 바로 이 대목에서 의료계 일부는 기재부의 예산 삭감보다 오히려 정 원장 발언에 담긴 의도를 더 궁금해하기도 한다. 두고두고 간섭없이 NMC의 쌈짓돈처럼 쓸 생각이 아니냐는 의구심 말이다.

위원회 구성이 늦어지는 건…

복지부를 향한 비판도 마찬가지다. NMC측은 지난 4월 28일 유족이 7000억원 납입 의사를 밝히자마자 이사회에 기금운용관리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이후 복지부에 NMC가 자체적으로 만든 위원 구성안을 제시했으나 복지부는 아직 위원 구성을 확정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정책 의지 실종"이라고 꼬집은 것이다.

복지부는 이런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는 입장이다. 한상균 질병정책과장은 "유족 측이 기부금은 NMC에 줬지만 콕 집어 복지부와 협의를 거쳐 집행해달라고 요구한 만큼 당사자인 복지부와 질병관리청, 그리고 NMC가 현재 논의를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일부러 시간을 끄느라 뭉개고 있는 게 아니라 세 부처 의견을 조율하느라 시간이 걸리는 것일 뿐"이라며 "당초 알려진 6월보다 늦어지긴 했지만 진행속도가 늦은 건 결코 아니다"라고도 했다.
위원회 구성이 늦어져 병원 건립에 발목이 잡혔다는 NMC 주장에 대해 의료계 안팎에선 주장이 엇갈린다. 익명을 요구한 한 감염병 전문가는 이런 의견에 대체로 동의했다. 그는 "이번 코로나19 대응에서 보듯 정부는 필요하면 언제든 행정명령으로 민간 병원 병상까지 쉽게 동원할 수 있다고 여기다 보니 감염병병원 건립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며 "특히 NMC를 거쳐 기부금이 직접 가는 국립감염병연구소 등이 질병청 산하이라 복지부가 이런 상황을 꺼리는 불편한 진실도 숨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투명성을 갖추기 위해 협의가 진행 중인데도 NMC가 여론을 호도한 측면이 있다"고 비판했다.

이동형 읍압병동에서 치료 받고 있는 모의 코로나19 환자. 이동형이 아니어도 음압병실에는 아주 큰돈이 들어가지 않는다. [중앙포토]

이동형 읍압병동에서 치료 받고 있는 모의 코로나19 환자. 이동형이 아니어도 음압병실에는 아주 큰돈이 들어가지 않는다. [중앙포토]

5000억 전부가 필요할까

삼성은 1990년대에 서울대에 암병동(2000년 완공한 삼성암연구동)을 지어주면서 당시 300억원을 썼다. 당시 암연구소장이었던 박재갑 명예교수는 "지금 돈으로 추산하면 3000억원 가까운 큰돈"이라고 했다. 유족 측은 세계 최고 수준 병원 건립비를 따져본 후 대략 4500억원이 들 거라 계산해 5000억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안명옥 전 NMC 원장은 "세계 최고 수준 병원으로 키우려면 5000억원도 부족하다"며 "이런 인프라를 만드는 데 정부가 매칭 펀드로 추가 5000억원을 더 내서 미국 대통령이 가는 월터 리드처럼 세계 최고 수준의 병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의견은 소수다. 정작 의료계에선 필요 이상의 너무 큰돈이라는 소리가 나온다. 정기석 교수는 "감염병병원은 음압시설 외에 크게 들어가는 돈이 없는데 이 큰돈이 헛되이 쓰일까 우려스럽다"고 했다.
암센터나 심장센터, 뇌센터 등은 첨단 시설로 전국의 환자가 모이기 마련이라 막대한 돈을 들여 병원을 설립해도 큰 무리가 없다. 하지만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감염병 특성상 중앙에 큰 돈 들여 하나의 시설을 갖추기보다 권역별로 두는 게 더 낫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기부 이전에 정부가 책정한 NMC 신축 예산은 1294억원(100병상)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의사는 "솔직히 1000여 억원 넘는 기부금은 눈먼 돈이라고 생각하니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국내 중증외상센터를 어렵게 어렵게 이끌어온 이국종 아주대 교수도 과거 한 언론 인터뷰에서 "예산이 나 같은 말단 노동자까지 안 내려온다"며 예산 뜯어먹기가 투전판 같다, 밥숟가락 들고 오는 게 아니라 밥상을 아예 들고 나간다"고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본인의 스타성으로 예산을 따도 정작 다른 사람들 돈잔치가 돼버린다는 얘기다.
5000억원의 신축 비용이 적정하냐 과도하냐를 놓고서는 의견이 엇갈리지만 전문가들은 현재 NMC 역량이 충분치 않다는 데는 대체로 동의한다. 정 교수는 "건축비 5000억원 이외에 연구개발비 2000억원 역시 NMC가 주도적으로 집행할 만큼 역량이 갖춰진 곳은 아니다보니 걱정되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안 전 원장도 "다시 오지 않을 엄청난 기회를 그냥 날려버릴까 조바심이 난다"고 했다.  최강원 서울시 코로나19자문위원장은 "지금껏 누구도 해보지 않은 일이니만큼 비단 NMC뿐 아니라 어떤 단일 기관도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며 "보통 몇 년씩 공들여 기다리다 기부금을 받는데 이번엔 아무 준비 없이 예상치 못한 큰돈이 들어와 우왕좌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필요 이상의 큰돈이 기왕 들어왔으니 투명하게 잘 운용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
복지부가 곧 내놓은 기금관리위원회 구성이 더욱 궁금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