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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의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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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해리 기자 중앙일보 기자
박해리 정치국제기획팀 기자

박해리 정치국제기획팀 기자

공무원 사이에 통하는 의전의 의미는 따로 있다. 잘하면 본전, 못하면 그 자리에서 박살나는 것. 저녁 간담회로 이어지는 행사에서는 식당 서빙이 주된 의전이 되기도 한다. 팀장의 손짓에 직원들이 주방에서부터 음식을 들고 나르는 것도 흔한 풍경이다. 그때마다 드는 회의감은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이지영, 『나는 9급 공무원입니다』 115쪽)

외교용어에서 시작된 의전(儀典)은 지켜야 할 규범을 뜻한다. 하지만 외교뿐 아니라 공직사회·정치권·기업에 깊게 뿌리 박혀 어느새 한국은 ‘의전공화국’이 됐다. 윗사람에게는 권력을 나타내는 척도가, 아랫사람에게는 윗선 눈에 나지 않도록, 혹은 눈에 들기 위한 허례허식이 된 것이다. 대통령을 위해 변기를 뜯고 새로 설치했다거나, 국무총리 관용차가 KTX 플랫폼까지 진입했다는 이야기는 고위공직자 과잉의전 역사의 조각들이다.

의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은 여의도다. ‘심기경호’라는 말을 밥 먹듯 쓰는 여의도의 의전은 밀착적이고 일상적이다. 의전을 중시한 과거 A당 대표는 스스로 치약을 짜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당 대표실에서 그가 자연스럽게 칫솔을 내밀면 주변에서 치약을 짜준다는 목격담이 기자들 사이에서 돌기도 했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B 원내대표를 한 당 관계자가 물샐틈없는 의전으로 만족시켰다는 소문이 퍼지자 상대 당 C 정치인은 “우리는 왜 저렇게 안 되냐”며 부러워했다는 후문도 있었다.

최근 사진 한장이 논란이다. 빗속에서 브리핑하는 법무차관 뒤에서 한 직원이 무릎을 꿇고 우산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현장에서 사진·영상 기자들이 우산 든 직원이 카메라에 나오지 않게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몇몇 여당 의원은 언론중재법이 필요하다는 뜬금없는 결론에 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상에는 법무부 관계자가 직원의 팔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모습이 포착됐다. 무엇보다 무릎 꿇고 있던 직원을 일으켜 세운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번 사건이 말해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 사회에서 당연하게 여겨온 과도한 의전을 그만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상식을 벗어난 의전에 대해서 받는 자, 시키는 자, 행하는 자, 보는 자 모두가 부끄럽다고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우산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드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