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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누가 고액권 지폐에 새겨지는 인물이 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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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허우성 경희대 명예교수

허우성 경희대 명예교수

세계 각국의 화폐는 대부분 자국 위인의 초상을 지폐의 앞면에 올린다. 그런 위인이 그 나라와 역사를 가장 잘 대표하기 때문이다. 화폐도안 인물의 품성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전 국민을 하나의 국가 속에 포용해서 통합하는 일이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화폐의 도안 인물 중 가장 후대의 인물은 누구인가?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이다. 100원짜리 주화에 새겨져 있다. 다른 인물로 세종대왕, 율곡, 퇴계 등 남성들만 있다가, 2009년 발행된 오만원권에 여성으로서 유일하게 신사임당이 올라와 있다. 대통령으로 지폐에 얼굴을 올린 인물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유일한데, 이 지폐는 1960년 그의 하야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통합상징 링컨·간디, 화폐 새겨져
차기 대통령, 중도 통합 전통 세워
고액권 지폐 도안의 주인공 되길

충무공 이후 400여년이 흘렀다. 그 이후 살다간 최소 1억명 이상의 조상 중 한국 역사를 빛낼 상징 인물, 위인 한 분을 찾지 못했다. 세계 200여개의 국가에서 유일할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국망이다. 조선은 17세기 이후 내리막길로 치닫다가 20세기 초 망했다. 망국에 대해 선조들에게 연대책임을 묻고 있는 셈이다. 다른 하나는 분열이다. 2007년 한국은행은 10만원권 지폐인물로 김구를 선정했지만 불발되었다. 이념의 다툼도 있었을 것이다.

미국의 화폐에는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등이 올라와 있고, 5달러 지폐와 1센트 주화에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새겨져 있다. 1928년 연방준비은행에서 발행되기 시작한 미국 화폐에 올라와 있는 인물 초상은 90년 이상 유지되었다. (『지폐: 꿈꾸는 자들의 초상』, 박구재)

2004년 이래 사용되고 있는 일본 지폐의 경우, 2000엔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지폐에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 등 19·20세기 인물이 새겨져 있다. 일본 나름의 통일된 역사관과 근·현대에 대한 자부심이 보인다. 중국의 인민폐에는 마오쩌둥이 새겨져 있다.

인도는 다인종·다언어 국가이지만 지폐 앞면에는 마하트마 간디의 초상이 공통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는 각 카스트에 속한 사람들과 아웃카스트를 하나로 묶어주는 품성과 정치력을 보였고, 힌두와 무슬림을 하나로 만들려다가 암살됐다.

링컨 대통령도 통합과 관용의 상징으로 유명하다. 1865년 남북전쟁 종전 직전 암살당하기 40여일 전, 그는 2차 취임사에서 “누구에게도 악의 없이,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With malice toward none with charity for all)라는 아름다운 말을 했다. 전쟁 승리를 자축하는 대신 국민 간의 화해와 통합을 호소한 것이다. 소외된 남부 국민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정치적 라이벌도 장관으로 임명한 일, 이것이 링컨의 관용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진정한 국민통합을 약속했다. 진심이었을 거다. 하지만 곧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4년 내내 경제·외교·국방등 각종 정책에서 독주했다. 우~ 몰려다니는 여당 의원들에게는 독립자존의 영혼이 먼저라고 말해야 할까? 국민은 서로 싸우며 상대에게 경멸·조롱·혐오의 악감정을 퍼붓는다. 악성 댓글은 양념이 아니라 사회에 독(毒)이다. 겁을 줘서 상대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자신의 선한 마음도 죽이기 때문이다.

이제 누구든 나와서 국민통합을 이룬다고 약속하라. 진정한 통합의 전제조건은 상대를 현실로 인정하고, 대화하면서 중도(Middle Ways)를 찾는 거다. 이는 윤리적 명령이 아니라 현실적인 요청이다. 중도여야 할 이유는 최소 두 가지다. 하나는 한국인의 행동 방향과 강도는 예측불허이고, 어떤 진영도 완전지가 없기 때문이다. 부동산 정책의 실패가 좋은 사례다. 외교 정책도 중도에서 나와야 오래가고 외국의 신뢰도 얻는다. 두 번째 이유는 보수와 진보는 세력이 비슷해서 서로 죽이기 어렵다. 중도만이 상생의 길이다.

상대를 인정하여 대화하자면, 먼저 우리 속의 미움과 분노를 다스려야 한다. 간디가 매일 기도한 것도 사랑과 비폭력을 기르고 닦기 위해서였다. 조국의 슬픈 운명을 안고 살아가는 14대 달라이라마는 티베트인과 중국인 모두를 위해 수시로 똥렌((གཏོང་ལེན), 곧 ‘주고받기 명상’을 한다. 적의 의심이나 분노는 받아들이고 나의 신뢰와 자비를 준다는 명상이다. 기도와 명상은 적을 대화의 상대로 바꿀 수 있다.

20대 대통령은 기도나 명상을 해서라도 미움은 뒤로하고 상대를 현실로 앞세워, 이성적인 대화로 중도 통합의 길을 찾기 바란다. 현실주의와 중도라는 위대한 전통을 세워 대대로 이어지게 하라. 그리하면 충무공 이후 처음으로 국민통합을 상징하는 최고액권 화폐에 새겨지는 인물이 될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을 때 우리는 비로소 편히 잠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