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굴욕, 바이든에 갚는다…김정은의 '영변 되치기'

중앙일보

입력 2021.08.30 15:54

업데이트 2021.08.30 17:51

국제원자력기구 이사회 보고서 [IAEA홈페이지]

국제원자력기구 이사회 보고서 [IAEA홈페이지]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대화 제안에 불응하던 북한이 핵 카드를 다시 꺼냈다. 평북 영변 핵 시설의 가동 징후를 노출했다. 국제사회의 핵 활동을 감시하고, 사찰하는 기구인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지난 27일(현지시간) 발간한 이사회 보고서에서 북한이 영변의 5㎿ 원자로와 재처리시설(방사화학실험실)을 다시 가동한 징후가 있다고 밝혔다.

IAEA는 “2021년 7월 초부터 냉각수 방출을 포함해 원자로 가동과 일치하는 정황들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영변의 방사화학실험실에 증기를 공급하는 화력발전소가 올해 2월 중순부터 7월 초까지 5개월가량 가동됐다”며 “이는 이전의 폐기물 처리나 유지보수 활동보다 상당히 긴 기간”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이 영변에서 핵 활동에 나섰다는 관측이 있었지만 IAEA가 이를 공식 확인한 셈이다.

정부 당국은 북한이 50여㎏의 플루토늄을 보유 중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국방백서). 이미 플루토늄을 이용한 탄두 10개 이상을 만들 수 있는 분량을 확보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영변에서 움직임을 드러낸 이유는 뭘까. 북한이 최근 “강력한 억제력 강화”를 주장해 왔다는 점에서 실제 핵물질 생산에 나섰을 가능성이 있다. 이춘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명예연구위원은 “북한은 이미 상당량의 플루토늄과 고농축우라늄(HEU) 등의 핵물질을 보유하고 있다”며 “북한이 지난 6월 전술핵 개발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HEU에 비해 소형화에 유리한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을 위협하려는 차원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 전문가들은 또 ‘김정은의 굴욕’으로 평가받았던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2차 북ㆍ미 정상회담을 주목한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담판에 나섰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영변을 무력화할 테니 민생과 관련한 다섯 종류의 제재를 완화해 달라”고 ‘영변 카드’를 꺼냈다. 하지만 당시 트럼프 대통령과 미측은 ‘영변+α’를 요구했고 회담은 결렬됐다. 김 위원장은 빈손 귀국한 뒤 “이런 열차 여행을 왜 또 하겠는가”라고 허탈해했다고 한다.

즉 북한은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서 퇴짜를 맞았던 영변 핵시설을 가동하면서 바이든 행정부를 상대로 되치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영변을 돌려 트럼프 행정부의 ‘기회상실’ 책임을 부각해 바이든 행정부에 시위하는 차원이다. 국제사회가 인공위성으로 영변을 정밀감시중이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북한이 이곳에서 움직임을 드러낸 자체가 ‘의도적인 노출’ 가능성을 보여준다.

북한이 한ㆍ미 연합훈련(16~26일)을 한 달여 앞둔 시점인 지난 7월 행동에 나섰다는 점도 북한의 택일 전술로 풀이된다. 북한은 통상 한ㆍ미 연합훈련을 전후해 각종 미사일 발사나 자체 대규모 훈련으로 맞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30일 현재 군사적으로 특이 동향은 없는 것으로 정보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이번 연합훈련 기간에 무력 시위는 없었지만 대신 북한은 핵 시위를 준비하며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다.

김 위원장은 지난 1월 열린 8차 당대회에서 한ㆍ미 연합훈련이 남북관계의 근본 문제라며 중단을 요구했다. 훈련 시작 직전인 지난 10일과 11일엔 김여정 당 부부장과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이 각각 나서 “절대적 억제력 강화”라거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언급하며 긴장 수위를 높였다. 이어 영변 핵시설 가동 징후를 노출해 '영변 핵' 재가동과 한·미 연합훈련 및 주한미군을 등가로 맞추려는 속내를 드러냈다.

무엇보다 지난달 27일 남북 통신선 복구가 북한이 남북 관계 개선 차원에서 결단했다는 해석은 더욱 설득력을 얻기 어렵게 됐다. 북한은 영변을 가동한 상태에서 통신선 복구로 남북 대화를 재개하는 듯 내비친 뒤 다시 연합훈련을 이유로 통신선을 끊었다. 전체 맥락으로 보면 한·미 모두를 향해 북한의 요구에 따르지 않을 경우 영변의 전면 가동이나 그 이상의 핵 개발을 가속화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낸 게 된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5월 외교적 해법에 방점을 찍은 새로운 대북정책을 확정했다. 한ㆍ미 정상회담(5월 21일) 자리에선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성 김)를 임명함으로써 대화 의향도 알렸다. 이런 미국을 상대로 북한은 영변을 보여주며 자신들의 몸값을 높이려 하고 있다. 앞으론 영변 핵시설의 일괄 불능화 조치가 아닌 쪼개기식 협상으로 나설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앞서 북한은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미국이)황금 같은 기회를 날렸다”고 주장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하노이 회담 이후 중단된 북미협상의 재개를 앞두고 영변 핵시설이 여전히 유효한 대미 협상 카드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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