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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현영의 워싱턴살롱

'미국 우선주의'와 '미국이 돌아왔다' 사이에 선 바이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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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박현영 기자 중앙일보 경제에디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20일 아프간에서 미국인과 아프간 난민 대피에 관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왼쪽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오른쪽은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A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20일 아프간에서 미국인과 아프간 난민 대피에 관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왼쪽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오른쪽은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AP=연합뉴스]

“알카에다가 사라진 지금,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에 무슨 관심이 있습니까?”

바이든, 세계 향해 외교 복귀 선언 #아프간 철군은 트럼프식 미국 우선 #조기 철군 반대 유럽 "따귀 맞은 꼴" #중동 탈피 美, 아시아로 중식축 이동

지난 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아프간 철군 사태에 관한 대국민 담화 중간쯤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다. ‘미국 우선주의’를 주창했던 고립주의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어울릴법한 발언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알카에다를 제거하고 오사마 빈 라덴을 잡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갖고 갔고, 그걸 이뤘다”고 말했다.

9ㆍ11테러 주범인 빈 라덴과 알카에다에 보복하기 위해 본거지인 아프간을 침공했고, 소기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더는 아프간에 머물 국익이 없다는 뜻이었다.

바이든은 “만약 빈 라덴이 알카에다와 함께 예멘에서 공격을 감행했다고 상상해보자”고 제안한 뒤 “그럼 우리가 아프간에 갈 이유가 있었을까? 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국익은 뭔가?”라고 다시 물었다.

아프간 주둔 미군 철수 결정과 실행은 집권 8개월을 맞은 바이든이 처음 보여준 ‘현실 외교’다. 이란핵합의(JCPOA) 재협상같이 먼저 착수한 어젠다는 아직 결실을 보지 못했고, 지난 6월 유럽을 돌며 주요 7개국(G7), 나토(NATOㆍ북대서양조약기구),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 참석한 것은 대서양 동맹 복원에 시동을 건 정도였다는 평가다.

동맹 외교 선언했지만 아프간 철군은 트럼프식 

“질서 정연”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참혹하고 무질서한 아프간 철군 작전 실패는 바이든 외교 정책 난맥상을 한눈에 보여주는 사건이다.

바이든은 대통령 취임 일성으로 세계를 향해 “미국이 돌아왔다(America is back)”고 외쳤지만, 아프간 철군을 결정하고 실행하면서는 내면에 있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유럽 외교관들은 바이든이 철군을 계획할 때 미국과 함께 아프간전쟁에 참전한 영국·프랑스·독일 등 주요 동맹과 충분히 생각을 나누거나 검토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에 따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일방주의를 지우고 동맹 관계를 복원하겠다고 다짐한 바이든이 아프간 철군 문제에서는 트럼프처럼 행동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지난 7월 초 아프간 내 바그람 공군기지 폐쇄 같은 중요 결정이 미국 단독으로 이뤄졌다고 했다. 한 유럽 외교관은 “외국 파트너와의 토론은커녕 (바이든) 팀 내부에서도 의미 있는 토론이 없었다”면서 “모든 게 너무 급하게 진행됐다”고 말했다.

미국·나토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사망자.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미국·나토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사망자.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더구나 유럽은 바이든이 동맹과 협의했다고 주장하는 데에 더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나토 동맹은 급작스러운 아프간 철수에 반대했고, 자국민 철수와 아프간 난민 구조를 위해 8월 31일 철군 시한 연장을 요구했는데도 바이든은 원안대로 강행했다.

미국과 함께 아프간전에 참여한 나토 동맹군은 1144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군 사망자 2448명(지난 4월 기준)에는 못 미치지만, 미국이 당한 9·11 테러를 유럽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나토 조약에 따른 상호 방위 의무를 수행한 영·프·독 입장에서는 “따귀를 한 대 맞은 꼴”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국내 정치적 이유" 때문에 아프간 철군 강행 

바이든이 아프간 철군을 밀어붙인 것은 미국 내 인프라 투자 등 미국 재건이 시급하고, 해외 갈등에 개입해 미군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그만둬야 한다는 인식이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자를 막론하고 미국인 사이에 폭넓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고 워싱턴포스트(WP)는 진단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바이든이 철군을 고집한 것은 “국내 정치적 이유 때문인 것 같다”고 평가했다고 DW 등 독일 언론이 전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이후 미국인들은 미국의 국제사회 개입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 트럼프 전 대통령이 정치 공약으로 활용하면서 정점을 찍은 뒤 바이든 행정부도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와 경제 회복 등 불확실성이 커 내년 중간선거에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바이든이 아프간 철군을 서둘렀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자살 폭탄테러로 미군 13명 등 200명 가까이 숨진 카불 공항의 아비규환에 대해 미국 여론은 부정적이지만, 이 같은 혼란은 역설적으로 미군의 추가 희생을 막기 위해 “끝없는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바이든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지점이기도 하다.

코로나19 백신 부스터 샷 승인 '미국 우선' 

아프간 사태가 전개되는 와중에 지난주 바이든 행정부는 코로나19 백신 부스터 샷 접종을 승인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전 세계적 백신 품귀 현상을 거론하며 부스터 샷 접종을 미뤄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를 묵살한 것도 바이든의 미국 우선주의의 한 예로 꼽힌다.

이처럼 바이든이 트럼프와 표현 방식만 다를 뿐 일부분 비슷한 생각을 갖는 것은 중산층 민심을 잡지 않고는 정권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중산층을 위한 외교”를 들고나온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바이든 참모들은 바이든과 트럼프는 유사한 세계관을 갖고 있지 않으며, 정책이 겹치는 것은 우연일 뿐이라고 주장한다고 WP는 전했다.

아프간 사태 이후 동맹의 신뢰,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리더십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자 바이든은 미국이 세계에서 철수하는 게 아니라 중동에서 발을 빼는 것이며, 이곳에 쏟아부었던 자원과 인력을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이 벌어지는 보다 중요한 승부처인 아시아로 이전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서운함이 큰 유럽과 달리 아시아는 이번 사태로 미국에 대한 신뢰가 크게 흔들리기보다는 자체 방어력을 높이는 데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한국, 일본과 호주 등 아시아 동맹들은 아프간과는 상황이 다르다면서 오히려 미국이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 전략을 실천하는지 눈여겨보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