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해서 이자도 별로 안줘요" 이 말에 노후자금 몽땅 털렸다

중앙일보

입력 2021.08.28 06:14

업데이트 2021.09.19 00:24

[2회] 금융사기공화국의 진화 : 은행·증권은 왜 가담했나

4월 15일 오후 서울 중구 NH농협금융지주 본사 앞에서 NH농협금융의 옵티머스펀드 계약 취소 및 원금 전액 배상 금감원 분조위 결정 수용 촉구 서한 전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4월 15일 오후 서울 중구 NH농협금융지주 본사 앞에서 NH농협금융의 옵티머스펀드 계약 취소 및 원금 전액 배상 금감원 분조위 결정 수용 촉구 서한 전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공공기관에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6개월 이내에 연 3% 수익을 준다니까 노후 자금 수억 원을 맡겼던 거죠. 엄청난 고수익도 아니고 농협 브랜드를 쓰는 증권사(NH투자증권) 프라이빗뱅커(PB·자산관리사)가 권유한 게 사기 상품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옵티머스 피해자 A(65)씨는 고통스러웠던 지난 1년간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이같이 말했다. 그의 말에는 주목해야 할 단어들이 있다. ‘연 3%’ ‘노후 자금’ ‘NH투자증권’ ‘사기 상품’이 그것이다.

A씨가 평생 모은 노후 자금과 마찬가지로 투자할 곳을 찾아 헤매는 국내 단기 부동 자금은 1683조원(5월 말 기준)에 달한다. 이는 사상 최대치인 데다 최근 그 증가 속도도 점차 빨라지는 양상이다. 이 돈을 노리는 ‘사기 금융 상품’이 사람들이 속기 쉬운 ‘연 3%’의 수익률을 제시하면서 제도권 금융사에서 버젓이 팔렸다.

“이쯤 되면 금융사기공화국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는 이유다. 법률·금융 분야 전문가들은 “갈수록 금융 범죄가 진화해 누구나 쉽게 타깃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상품 다단계→금융 다단계→사모펀드 진화…5대 사건만 10조원 털렸다

5대 금융 사기 사건 개요.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5대 금융 사기 사건 개요.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중앙일보는 최근 금융 사기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2000년대 이후 1조원 이상의 대규모 다중 피해(편취액 기준)를 준 5대 금융사기 사건을 분석했다. 주범들의 판결문, 피해자들의 증언, 전문가 취재를 통해서다.

분석 대상은 ▶조희팔의 다단계 사기 사건(피해액 5조원)▶김성훈의 IDS홀딩스 사건(1조856억원) ▶이철의 밸류인베스트코리아(VIK) 사건(1조원) ▶이종필의 라임자산운용 사건(1조6000억원) ▶김재현의 옵티머스자산운용사건(1조3526억원) 등 5개 사건이다.

금융 사기는 다단계 유사수신 업체에서 무허가 금융투자업체, 이어 제도권 금융회사(자산운용사의 사모펀드)로 갈수록 진화했다.

금융 사기의 표본으로 불리는 2004년 조희팔 사건은 ‘상품 다단계’ 유형으로 분류된다. 조희팔의 2인자로 징역 22년을 확정받은 강태용의 판결문에 따르면 조희팔 일당은 대구·인천·부산 등 25개의 법인과 50개의 센터를 운영하며 피해자들을 의료기 렌털사업 투자자로 끌어들였다. ‘회사를 믿고 투자하면 부자가 된다’ ‘수익금은 반드시 보장한다’는 말로 7만여명을 금융 사기의 늪으로 끌어들였다.

IDS홀딩스 사건은 ‘금융 다단계’ 사기 방식이다. 주범인 김성훈은 먼저 2010년 홍콩에 KIS라는 선물거래중개회사를 설립한 뒤 2011년부터 전국 대리점을 통해 투자금을 모았다. IDS홀딩스는 전자상거래업 등을 목적으로 설립 신고한 회사였다.

수법이 교묘해진 건 의료기기 같은 실물 투자가 아니라 일반 투자자는 이해하기 힘든 국제외환시장의 ‘FX(외환) 마진거래’라는 낯선 금융상품을 투자 대상으로 내걸었다는 점이었다.

서민 꿈 짓밟은 금융사기공화국

지난달 1심 무죄를 선고 받은 이동재 전 채널A 기자의 강요미수 혐의 피해자로 더 유명해진 이철이 2011년부터 벌인 VIK 사건은 초기 형태의 사모펀드형 범죄로 분류된다. “사모펀드를 운용해 연 20% 수익을 지급하겠다”“유망한 비상장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 등에 투자한다”는 명목으로 투자금을 모았기 때문이다. 모집 방식은 여전히 전국 단위 다단계 조직을 통해서였다.

다만 VIK는 IDS홀딩스처럼 금융당국의 설립 인가를 받지 않은 무허가 업체였고 사모펀드를 ‘사칭’했지만 금융감독원에 펀드 등록도 하지 않았다.

VIK는 투자금이 들어오면 대표이사와 영업사원들은 운영자금 명목으로 20%를 먼저 떼어갔다. 나머지 80%를 투자해 원금 보전은 물론 추가 수익까지 보장하겠다는 비합리적인 구조였다. 전설적 투자자 워런 버핏의 연평균 수익률이 20% 안팎이다.

지난해 대한민국을 뒤집어놓았던 라임과 옵티머스는 완성된 사모펀드형 사기로 평가된다. 두 회사는 금융위원회의 정식 자산운영사 설립 인가를 받고 사모펀드(또는 공모펀드)를 등록한 뒤 은행과 증권사 등 제도권 금융회사를 통해 팔았다. 외관상 법적 요건을 갖췄기 때문에 투자자들은 사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금융피해자연대에서 활동하는 이민석 변호사는 “최근 대형 금융 사기 사건은 다단계 조직 대신 버젓이 은행·증권사에서 판매하는 형태로 진화했다”며 “금융위·금감원이 초기에 잡아내지 못하고, 검찰·법원도 솜방망이 처벌을 하니까 사기의 형태가 이렇게 발전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주요 피고인 형량.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주요 피고인 형량.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은행·증권사, 판매 수수료 1%에 알지도 못하는 상품 팔았다

5대 금융 사기 사건의 공통점은 전문가들조차 이해하기 어렵고 비합리적인 금융 상품을 소개한다는 점이다. 그러고선 FX마진거래 같은 투자는 제대로 않고 나중에 투자한 후순위 투자자 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이자(수익)를 주며 돌려막기하는 ‘폰지 사기’를 벌였다. 더이상 후순위 투자자를 끌어들이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대형 금융 사고가 발생한다.

옵티머스의 경우 한국토지주택공사(LH), 부산항만공사 등 공공기관 공사를 수주한 기업들의 매출채권, 즉 ‘공공기관 매출채권’에 투자하는 펀드임을 내세워 안전성을 강조했다. 옵티머스 일당은 투자제안서에 매출채권을 해당 공공기관에 직접 인수하는 방법, 관계회사나 자회사를 통해 사모사채를 인수하는 간접적인 방법이 있다며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여기에 기관 투자가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을 비롯해 금융 전문가라는 증권사와 은행도 넘어갔다.

1심 재판부는 공공기관 매출채권은 애초부터 투자 자체가 불가능한 자산이라고 판단했다. 국가계약법에 국고로 진행하는 공사대금은 빠른 시간 내 현금 지급하도록 돼 있어 공공기관 매출채권이 시장에 융통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결국 펀드 자금은 약속과 달리 공범인 유현권·이동열 등이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페이퍼컴퍼니(SPC)가 발행한 사모사채에 투자됐다.

라임이 판매한 펀드 구조 역시 상당히 복잡하다. 코스닥 기업들이 발행하는 사모채권과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에 각각 투자하는 두 개의 모(母)펀드를 만들었다. 해당 투자 자산은 만기가 정해져 있어 투자자들이 원할 때 환매를 해줄 수 없다.

라임 일당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2개의 모펀드 투자 비중을 다양하게 조합해 50여개의 자(子)펀드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독립적으로 운용돼야 하는 펀드가 서로 수익률에 영향을 주며 연쇄 환매 사태를 야기했다. 라임 주범들이 1심 유죄 판결을 받는 데 결정적 근거였던 무역금융펀드는 다수의 해외 무역금융펀드에 투자하는 재간접펀드로 총수익스와프(TRS)라는 금융기법까지 사용돼 일반 투자자로서는 펀드의 실체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복잡한 구조 탓에 펀드를 이해하지 못하고 판매한 증권사·은행 직원들도 상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투자금 1% 안팎의 높은 판매 수수료를 노려 ‘묻지마 판매’에 가담했다.

검찰·법원, ‘불완전판매’‘사후 수익보전’ 판매사 책임도 물어

법원과 검찰은 펀드를 불완전 판매한 판매사들의 책임도 물었다. 서울고법은 지난 5월 “라임은 연 수익률 8%, 원금 손실률이 0%에 가깝게 설계됐다”며 투자자 470명에게 1965억원 상당을 판매한 장모 전 대신증권 센터장에 자본시장법 위반(사기적 부정거래 등)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했다. 금융감독원은 이 같은 법원 판결을 근거로 대신증권의 라임 투자자 배상 비율을 80%로 정했다.

서울중앙지검은 같은 달 “공공기관 매출채권이라 확정 수익이 난다”며 옵티머스 펀드를 불완전 판매한 뒤 목표 수익에 미달하자 1억2000만원 수익을 사후 보전해준 혐의로 NH투자증권과 직원 3명을 기소했다.

라임은 연 7~8%, 옵티머스는 연 2~3% 수익률을 제시했다. 조희팔 일당이 월 2~3%(연 24~36%), IDS홀딩스 월 1~10%(연 12~120%) 그리고 VIK 연 20%에 비하면 훨씬 낮은 수준이다. 저금리 환경 탓도 있지만 대규모 자금을 끌어들이는 데 오히려 현실적인 수익률을 제시하는 것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 변호사는 “1조원 이상 투자금을 끌어모으려면 허황된 수익률로는 속일 수 없다”며 “오히려 현실적으로 수익률을 낮추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금융 사기 피해자들의 증언.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금융 사기 피해자들의 증언.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돌고 돌다 사라진 돈…범죄수익 은닉처 발견, 피해 복구 어렵다

금융 사기꾼 일당에게 흘러간 피해자들의 돈은 돌고 돈다. 펀드 돌려막기와 페이퍼컴퍼니를 활용한 자금 횡령, 착복, 주범들의 해외 도주가 이어지며 그 많던 돈이 자취를 감춘다. 사모펀드와 다단계 조직은 자금 흐름이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피해 복구는 더디고 어렵다.

라임은 투자금으로 기업사냥에 나서 피해를 더 키웠다. 라임 사태의 ‘몸통’으로 지목돼 온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이 이런 식으로 빼돌린 금액만 수백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종필 라임 부사장의 경우 코스닥 기업에 투자해주는 대가로 명품시계, 외제차 등을 받았다.

김경율 경제민주주의21 대표(회계사)는 “라임·옵티머스 등 권력형 비리 의혹이 제기된 금융 사기 사건에서 수사기관이 범죄수익이 은닉된 자금의 최종 귀착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며 “수사 의지가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정구집 라임자산 피해자대책위원회 공동대표가 5월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김부겸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며 울먹이고 있다. 연합뉴스

정구집 라임자산 피해자대책위원회 공동대표가 5월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김부겸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며 울먹이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인이 거기서 왜 나와…“사모펀드 장막, 정치자금 저수지로 매력적”
대형 금융 사기 사건에는 고위 정·관계 인사 등 정권 연루 의혹, 수사기관 무마 의혹 등의 새로운 사건이 파생되는 경우가 많다. VIK 사건의 경우 한동안 매달 사무실에서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명사특강을 진행했는데, 여기에는 현 정권과 가까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김수현 전 청와대 정책실장, 이재정 경기도교육감, 도종환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이 나섰다.

이들은 “특강만 했을 뿐 VIK의 실체를 전혀 몰랐다”는 입장이지만 고위층이 투자자들에 신뢰감을 주는 ‘병풍’으로 활용됐다고 전문가들은 꼬집는다.

최근 옵티머스 사건에서는 ‘펀드 하자 치유’ 문건이 논란이었다. 이 문건에는 노무현 정부 시절 경제부총리를 지낸 이헌재 여시재 이사장과 채동욱 전 검찰총장, 양호 전 나라은행장 등이 고문단으로 활동하며 옵티머스를 비호한 정황이 담겼다.

검찰은 지난 6월 이 사건 결심 공판에서 “옵티머스 일당이 이 사건을 정·관계 로비 사건으로 호도하며 범행을 은폐하려 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최근 문건에 등장한 인사 전원을 무혐의 처리했다. 검찰총장 재직 당시 이 사건에 강한 수사 의지를 드러냈던 윤석열 전 총장 측은 “각종 정·관계 로비 의혹에 대해 검찰이 직접 나서 판도라의 상자를 더 단단히 밀봉해 버렸다”고 지적했다.

‘조국 흑서’(『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등의 저자 권경애 변호사는 “거대 금융권 말고 큰 덩어리의 자금을 만질 수 있는 게 사모펀드 시장”이라며 “실체가 없는 돈을 움직이고 장막으로 가릴 수 있어 정치 자금이 필요한 정치인들에겐 매력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서민 꿈 짓밟은 금융사기공화국 시즌1

서민 꿈 짓밟은 금융사기공화국
선진 금융감독 시스템을 도입했다던 외환위기(IMF) 이후 25년, 대한민국은 거꾸로 금융사기공화국(www.joongang.co.kr/series/11478)으로 전락했습니다. 조희팔부터 IDS홀딩스·VIK·라임·옵티머스 등 5대 사건의 피해자만 12만명, 피해 금액은 10조원이 넘습니다. 평생 번데기를 판 돈, 남편 사망보험금까지 빼앗긴 서민들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금융사기공화국을 만든 이들을 중앙일보 사회1팀 기자들이 총 10회에 걸쳐 추적합니다. 대형 금융사기를 막을 수 있는 해법도 찾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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