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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울린 피해자 중심주의…이용수 할머니 ‘세 갈래 분노’[뉴스원샷]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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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지혜 외교안보팀장의 픽 : 윤미향 ‘셀프 보호법’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지난해 5월 대구 수성구 만촌동 인터불고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지난해 5월 대구 수성구 만촌동 인터불고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제가 나이가 많아서 무시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생생합니다.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법을 만들 거면 나한테 물어봤어야지요. 아무리 내가 잘 모른다고 해도 옳고 그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분노했다. 위안부 관련 단체에 대해 사실을 말할 경우에도 명예 훼손 행위로 보고 금지할 수 있는 법안이 발의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난 23일 통화에서다.

피해자도 몰랐던 피해자보호법

이 할머니의 분노는 크게 세 갈래였다. 첫째, 피해자들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법을 개정한다면서 정작 피해자들의 의사는 묻지도 않았다는 점. 둘째, 그러면서 슬쩍 명예를 훼손해선 안 되는 대상에 위안부 관련 단체까지 끼워 넣은 점. 셋째, 보조금 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윤미향 의원(무소속)이 공동발의자로 이름을 올린 점.  

법안의 문제점을 스스로도 부인할 수 없었는지 이를 대표 발의한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발의한 지불과 12일 만에 법안을 철회했다. 각계에서 비판이 제기되고 민주당이 당 차원에서 발의한 법안이 아니라고 빠르게 ‘손절’한 직후였다.

“철회돼 다행” 그냥 넘기기엔…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했다 철회한 위안부 피해자 보호법 개정안. 자료 의안정보시스템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했다 철회한 위안부 피해자 보호법 개정안. 자료 의안정보시스템

결과적으로는 없던 일이 됐지만, 다행이라고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다. 정부·여당이 강조해왔던 과거사 문제 해결 원칙인 ‘피해자 중심주의’를 스스로 부정한 건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해당 법안이 발의된 건 지난 13일.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기도 한 이튿날 정영애 여성가족부 장관은 SNS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고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법 개정 등의 조치를 통해 엄정하게 대응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직후 한 언론은 인재근 의원의 법안 발의 소식을 전하며 여가부 관계자가 “민법과 달리 일종의 특별법 성격으로 위안부 ‘개인’에 대한 명예훼손과 상관없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왜곡된 사실을 유포해 역사를 왜곡할 경우 엄격히 처벌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번 법안을 단순히 여당 의원이 자체적으로 발의한 게 아니라 정부와도 사전에 어느 정도 교감이 이뤄졌다는 뜻으로 볼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소녀상에 빗물이 떨어지고 있다. 뉴스1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소녀상에 빗물이 떨어지고 있다. 뉴스1

처음부터 ‘피해자 단체 중심주의’였나  

문재인 정부가 피해자 중심주의를 들고나온 건 전 정부에서 이뤄진 ‘2015년 12ㆍ28 한ㆍ일 위안부 합의’를 검증하면서다. 외교부 장관 직속으로 꾸려진 검증 태스크포스(TF)는 당시 합의가 피해자 중심주의에 위배되기 때문에 하자가 심각하다고 결론내렸다.

하지만 정작 TF는 검증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아닌 관련 단체의 의견을 주로 청취했다. 정부가 지향하는 게 ‘피해자 중심주의’가 아니라 ‘피해자 단체 중심주의’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 이유다.

지난해 5월 이용수 할머니가 처음으로 정의기억연대(옛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윤미향 의원(전 정대협 대표, 정의연 이사장)을 비판한 것도 본질은 피해자 중심주의와 맞닿아 있었다. 대표적인 게 윤 의원이 2015년 위안부 합의 당시 일본이 낼 10억엔에 대해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정의기억연대(옛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후원금 유용 혐의 등으로 기소된 윤미향 무소속 의원이 지난 11일 오후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정의기억연대(옛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후원금 유용 혐의 등으로 기소된 윤미향 무소속 의원이 지난 11일 오후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정의연 설명에 따르면 윤 의원은 합의 전날 외교부로부터 10억엔에 대해 전해 들은 뒤 ‘법률자문위원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관련 판단을 다음 날로 보류했다.

피해자 백안시할 권리, 누가 줬나  

단순히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중에 딴소리를 했느냐는 이야기가 아니다. 합의의 주요 내용을 사전에 인지했으면서 왜 정작 피해자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10억엔에 대한 판단은 자신들이 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면, 이는 피해자들을 백안시한 것과 다름없다. 그때도 지금도, 이 할머니의 분노는 여기서 비롯된다.

사실 이번에 문제가 된 법안의 취지 자체는 바람직하다. 의도적으로 위안부 피해와 관련한 진실을 왜곡하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거짓으로 피해자와 유족의 명예를 훼손할 수 없도록 하자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엉뚱하게 위안부 관련 단체가 포함되고, 윤 의원이 참여하면서 이런 본질은 훼손됐다.

지난달 24일 일본 교토부(京都府) 교토시의 한 시설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전시된 가운데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 증언한 고 김학순 할머니의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4일 일본 교토부(京都府) 교토시의 한 시설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전시된 가운데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 증언한 고 김학순 할머니의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연합뉴스

‘피고인 윤미향’ 논란 예상 못 했나

해당 사안에 대해 이해 당사자나 마찬가지인 ‘피고인 윤미향’이 공동발의자로 포함됐을 때 일어날 파장과 뜨거운 논란을 윤 의원 본인이 과연 몰랐을까. 자신이 주장해온 대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게 맞는다면, 할머니들을 위하는 마음이 진심이라면, 이번 법안과 관련해서는 스스로 한발 물러서는 게 맞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어떻게 이따위 행동을 합니까. 어떻게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까. 내가 큰소리를 안 내려 했는데, 너무 서러워서….”

나라가 지켜주지 못해 그런 일을 당했다. 그런데 나라를 되찾은 지 76년이 지난 오늘까지 왜 이용수 할머니는 서러워야 하나. 누군가는 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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