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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칭대 세운 스튜어트, 20세기 격동의 미·중 관계 산증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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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1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91〉 

1919년 개교 초기의 옌칭대학. 흔히들 옌위안이라 불렀다. [사진 김명호]

1919년 개교 초기의 옌칭대학. 흔히들 옌위안이라 불렀다. [사진 김명호]

1955년 8월 워싱턴, 전 주중대사 스튜어트는 세상 떠날 날이 머지않았다는 예감이 들었다. 유촉(遺囑)을 작성했다. 1919년 중국에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은 후, 희열과 고통을 함께한 푸징풔(傅涇波·부경파)에게 봉투를 건넸다. “내가 죽으면 뜯어봐라.”

스튜어트의 말년은 처량했다. 중풍으로 언어 능력을 상실하고 글씨도 제대로 못 썼다. 2002년 6월, 군 복무 중인 푸징풔의 아들 푸리런(傅履仁·부리인)이 구술을 남겼다. “아버지는 스튜어트를 모시기 위해 워싱턴 교외에 집을 마련했다. 나와 누이는 스튜어트를 할아버지라 불렀다. 우리 집에는 할아버지 만나러 오는 특별한 손님이 많았다. 주미대사 후스(胡適·호적)는 아버지에게 깍듯했다. 마셜 원수는 주말마다 직접 차를 몰고 왔다.”

중국인 제자가 스튜어트 말년 뒷바라지

미국으로 돌아온 스튜어트는 무일푼에 갈 곳도 없었다. 죽는 날까지 푸징풔(오른쪽 첫째)가 마련한 집에 기거했다. 스튜어트 뒤가 푸리런. 1950년대 말, 워싱턴. [사진 김명호]

미국으로 돌아온 스튜어트는 무일푼에 갈 곳도 없었다. 죽는 날까지 푸징풔(오른쪽 첫째)가 마련한 집에 기거했다. 스튜어트 뒤가 푸리런. 1950년대 말, 워싱턴. [사진 김명호]

1962년 9월 19일, 7년간 사경을 헤매던 스튜어트가 눈을 감았다. 시카고트리뷴에 실린 중국 역사학자의 기고가 눈길을 끌었다. “중국인들에게 20세기를 통틀어 스튜어트와 견줄 만한 미국인은 없었다. 중국의 정치, 문화, 교육에 미친 영향은 헤아리기 힘들다. 중·미 관계의 연합과 파열의 산증인이다.” 과장이 아니다. 스튜어트는 50년간 청말 신정(新政)과 혁명, 공산당의 무장폭동과 항일전쟁, 국·공 전쟁을 현지에서 체험한 유일한 미국인이었다.

유촉은 간단했다. “푸징풔에게 청한다. 유골을 옌위안(燕園)에 있는 처자 옆에 안장해주기 바란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에게 선물 받은 명(明)대의 5색 화병은 원주인에게 돌려줘라.” 옌위안은 50여 년 전 스승이 설립한 옌칭대학(燕京大學)을 의미했다. 푸는 스승의 골회(骨灰)를 하장(下葬)하지 않았다. 생전에 기거하던 방에 모셔놓고 매일 기도했다. 푸는 국제정세에 밝았다. 1960년대 말 중·소 관계가 악화되자 중국과 미국이 악수할 날만 고대했다. 1972년 키신저의 중국 방문 후 24년간 얼어붙었던 미·중 관계에 훈풍이 돌기 시작했다. 화교방문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가는 딸에게 편지 한 통 주며 당부했다. “저우언라이에게 보내는 편지다. 고위층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그냥 전달해라. 저우는 내 글씨를 안다.” 이듬해 가을, 푸는 “극비리에 조용히 다녀가라”는 저우언라이의 초청장을 받았다.

푸징풔는 베이징에 10개월간 머물렀다. 교우들을 부지런히 만났다. 살벌한 시절이었다. 스튜어트 얘기만 나오면 안타까운 표정 지으며 말길을 돌렸다. 무슨 일이건 대책이 있었던 저우언라이는 병중이었다. 병실에서 눈길만 주고받았다. 10년 후 푸는 다시 중국을 찾았다. 고위층들의 환대는 여전했지만 옌위안에 묻히고 싶다는 옛 교장의 소원을 실현에 옮길 능력은 없었다. 기다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여 교우들은 말없이 펑펑 울기만 했다.

옌위안 완공 전, 직원들과 함께한 옌칭대학 교장 스튜어트(왼쪽 둘째). [사진 김명호]

옌위안 완공 전, 직원들과 함께한 옌칭대학 교장 스튜어트(왼쪽 둘째). [사진 김명호]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1986년, 베이징대학 측이 스튜어트 골회를 교내에 안장하겠다며 중앙서기처에 동의를 구했다. 서기처가 수락하자 반대 목소리가 난무했다. “스튜어트는 마오(毛·모) 주석에게비판받은 사람이다. 베이징대학이 끌어안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푸징풔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편지를 베이징대학에 보내고 또 기다렸다. 2년 후 88세를 일기로 워싱턴에서 세상을 떠났다.

다시 10년이 흘렀다. 세인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두 명의 정치가가 역사의 골짜기에 갇혀있던 옌칭대학을 끄집어냈다. 한 명은 미국인이고, 다른 한 명은 중국인이었다. 1998년 6월 29일 중국을 방문 중인 미국 대통령 클린턴이 베이징대학을 찾았다. 80년 전 스튜어트의 의뢰로 미국 유수의 건축가 머피가 설계한 옌위안의 페이궁러우(貝公樓) 2층 강당에 운집한 학생들에게 강연했다. 베이징대학 개교 100주년을 축하하며 옌칭대학을 거론했다. “지금 나는 미국 선교사가 설립한 옌칭대학 교정에 서있다. 옌위안의 건물도 미국 건축가가 설계했다. 예전에 이곳에서 많은 미국인 교수와 학생들이 가르치고 배웠다. 나도 여러분과 특수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생방송으로 전국에 중계된 클린턴의 강연을 계기로 없어진 지 오래인 옌칭대학과 설립자 스튜어트의 이름이 세간에 오르내렸다. 중국인들은 스튜어트를 스투레이덩(司徒雷登·사도뢰등)이라 불렀다.

항저우시, 스튜어트 생가를 기념관으로

하버드대학 방문단의 기념사진 촬영에 응한 스튜어트(앞줄 왼쪽 다섯째)와 옌칭대 교수들. 앞줄 왼쪽 셋째가 철학자 펑유란(馮友蘭). [사진 김명호]

하버드대학 방문단의 기념사진 촬영에 응한 스튜어트(앞줄 왼쪽 다섯째)와 옌칭대 교수들. 앞줄 왼쪽 셋째가 철학자 펑유란(馮友蘭). [사진 김명호]

2005년 국민당 명예주석 롄잔(連戰·연전)의 방문으로 옌칭대학이 다시 주목을 받았다. 롄잔은 클린턴이 섰던 자리에서 모친을 회상했다. “오늘 나는 국민당 대륙방문단과 함께 베이징대학에 왔다. 옌칭대학이 있던 곳이라는 것을 방금 알았다. 모친은 지난 세기 30년대에 이곳에서 공부했다. 초목과 오가는 사람 보며 옌칭대학 시절 모친의 모습을 상상하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옌칭대학은 나의 모교다. 모친(母)의 학교(校)였기 때문이다.” 베이징을 방문한 정치가들의 옌칭대학 회상은 묘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클린턴과 롄잔의 방문 보도에서 옌칭대학 관련 기사는 삭제시켰다.

2006년, 스튜어트 사망 40년 후, 푸리런이 육군 소장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 가을, 저장(浙江)성 대표단이 미국을 방문했다. 푸리런이 화교 중추모임 백인회 회장 자격으로 대표단을 접대했다. 만찬 석상에서 스튜어트의 골회를 저장성 항저우에 안치하자고 제안했다. “스튜어트는 항주에서 태어났다. 평소 고향을 물으면 항저우라고 했다. 부모와 형제들의 무덤도 항저우에 있다.” 귀국한 대표단은 수속을 밟았다. 스튜어트에게 항저우시 명예 시민증을 발부하고, 태어난 집을 ‘스투레이덩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원주인에게 돌려주라고 했던 5색 화병과 스튜어트의 유물도 기념관에 진열했다. 2008년 11월 17일 스튜어트의 골회 안장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국내외의 언론들도 상세히 보도했다. 베이징대학은 달랐다. 모른 체했다.

중국인들에게 추앙받던 스튜어트는 한동안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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