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인문학

만주 항일투쟁 이끈 허형식은 33세에 산화 ‘백마 탄 초인’

중앙선데이

입력 2021.08.28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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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1호 27면

중국 기행 - 변방의 인문학 〈끝〉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으로 활동한 허형식의 전투지 중 하나인 펑러진.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으로 활동한 허형식의 전투지 중 하나인 펑러진.

중국 하얼빈에서 북쪽으로 쑹넌(松嫩, 쑹화강과 넌강)평원을 여행하면 지평선이란 존재를 짜릿하게 실감할 수 있다. 지평선이 멈추거나 끊어지지 않는 것 같다. 초여름에는 어린 옥수수의 연한 잎들이 검은 밭고랑에서 손을 흔들며 연두색 지평선을 그린다. 이런 평원이라면 술래잡기 놀이도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나라를 찾겠다는 이들은 게릴라전을 벌였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자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각자 또는 협력(동북항일연군, 약칭 연군)하여 일제에 맞서 10년 동안 피를 흘렸다. 전력의 차이는 현저했고 1940년 가을 연군은 소련의 연해주로 피신해야 했다. 그러나 이때 끝까지 남아 싸운 이들이 있었다.

21세때 하얼빈 일 총영사관 맨손 습격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 전시된 허형식(오른쪽 둘째).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 전시된 허형식(오른쪽 둘째).

1942년 8월 3일 새벽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인 허형식은 하얼빈 북쪽 칭안현의 야산에서 경호원 셋과 함께 야영하다가 만주국군에 발각됐다. 치열한 전투 끝에 장렬하게 산화했다. 그들은 허형식과 경호원의 목을 베어 갔다. 두 개의 수급은 칭안현 경찰서 앞의 긴 장대 끝에 내걸렸다. 그들은 ‘공비 대두목 이희산(허형식의 가명)’이라고 써 붙였지만, 허형식의 동지들과 백성들은 장군이란 존칭과 함께 ‘만주의 마지막 파르티잔’이란 별명을 붙여 줬다. 누군가는 일본이 이렇게 빨리 망할 줄 몰라서 친일을 했다던 그 암울한 시절,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에 정면으로 부딪쳤던, 몇 년 만 더 버텨서 새로운 시대를 만들지 그랬냐는 속절없는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죽음이다.

그곳에 ‘허형식 희생지’라는 추모탑이 세워져 있다. 헤이룽장성 쑤이화시 다뤄진(綏化市 大羅鎭)의 도로변이다.

중국 땅에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이 많지만 한 개인을 추모하는 탑은 이것이 거의 유일한 것 같다. 중국 공산당 당원이었고, 동북항일연군의 최상위 편제인 제3로군의 총참모장이었으니 당연한 대우라고 할 것이다.

나는 독립운동 가문이라면 허형식, 허위 가문을 첫손에 꼽는다. 의병장 허위(건국훈장 대한민국장)를 비롯한 많은 친족이 1890년대 1900년대 의병투쟁에 목숨과 재산과 열정을 바쳤다. 1910년대에는 상당수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는 데 힘을 쏟았다. 허형식 항렬에서도 많은 형제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허형식(왼쪽)과 규식 형제. [사진 허술]

허형식(왼쪽)과 규식 형제. [사진 허술]

여성들도 도드라진다. 허형식의 사촌누이인 허길은 이육사(애국장)의 어머니. 육사는 독립운동가인 외삼촌 허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허은(애족장)은 허형식의 또 다른 사촌인 허발의 딸이다. 그는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집안으로 시집갔다. 친정과 시집 모두 독립운동 집안이라 평생을 죽도록 고생하며 독립운동을 내조했다. 허은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라는 귀중한 회고록(변창애 기록)을 남겼다.

허형식은 1909년 허위의 사촌인 허필(건국포장)의 아들로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지금 그곳에는 왕산 허위 기념관이 조성돼 있다. 여섯 살에 가문의 망명길에 얹혀 압록강을 건넜다. 1920년대에는 헤이룽장성 우창현에서 살았고 1929년 하얼빈시 빈안진으로 이사했다. 빈안진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군사부장인 최용건(북한 부주석)을 만나면서 허형식의 항일투쟁이 시작됐다. 1930년 초 일국일당주의에 따라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1930년, 노동절을 맞아 하얼빈의 일본 총영사관을 맨손으로 습격하는 데 앞장선 것이 데뷔전인 셈이다.

1931년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를 침략하자 동북군벌 계통 곳곳에서 유격대, 자위군 등의 이름으로 항일투쟁에 나섰다. 이들은 1933~35년 동북인민혁명군으로 통합됐고 1936년에는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됐다. 연군 계열에서 허형식과 김책, 최용건, 김일성 등이 유력한 지도자들이었다.

허형식은 1932년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서 선전과 조직 활동을 하다가 1933년 탕위안현과 주하현의 유격대 창설을 지원했다. 1935년 동북인민혁명군에서는 중대장급 간부였다.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되면서 1936년 9월에는 북만임시성위원회 위원 겸 제3군1사 정치주임이 되었다. 1939년에는 제3로군 총참모장 겸 3군장, 다음해에는 총참모장으로 북만주의 항일 무장투쟁을 주도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월등한 군사력으로 항일투쟁의 목을 조르자 중국 공산당은 1940년 가을 동북항일연군에게 소련으로 피신하도록 했다. 그러나 허형식은 자기 위치를 고수했다. 그는 중국인 조선인 모두에게 가늘지만 질긴 희망이었으나 더는 버티지 못했다. 1942년 허형식은 전사했고 만주는 완전한 침묵에 빠진 것이다.

소련으로 피신한 동북항일연군. 앞줄 오른쪽 둘째가 김일성. [사진 윤태옥]

소련으로 피신한 동북항일연군. 앞줄 오른쪽 둘째가 김일성. [사진 윤태옥]

허형식의 일생을 짚어 가면 두 인물이 만져진다. 동북항일연군의 다른 소속으로, 1940년 가을 서둘러 소련 땅으로 피신해서 살아남았고, 소련에 머물면서 정치적 후원은 물론 장남 김정일까지 얻은 김일성. 그는 북한으로 귀국해 최고 권력자가 됐고, 남한을 향해 전면전을 벌였다. 남한에서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가해자가 되었고, 북한에서는 경쟁자들을 모조리 숙청하여 절대 권력을 움켜쥐고는 세습신공까지 발휘했다. 그 와중에 한때 허형식의 부관이었고 김일성 측근이었던 강건(인민군 초대 총참모장)은 1946년 귀국하자마자 허형식의 두 자녀를 평양으로 데려와 보살폈다.

허형식과는 동향인 박정희는 허형식 생가의 경부선 건너편인 구미시 상모동에서 태어났다. 박정희는 교사생활을 접고 허형식이 무장투쟁을 하고 있던 만주로 갔다. 만주군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덕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고, 일본군 장교로 다시 만주에 부임해 왔다. 일제 패망 후 분단과 전쟁의 날카로운 틈새를 헤치고 살아남았다. 박정희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고 김일성과는 적대적이었지만 그것을 기반으로 장기집권으로 끌어갔다. 정치적 혼란 속에 부하에게 피살됐지만 그의 존재감은 지금까지도 크다.

동지들 “만주의 마지막 파르티잔” 칭송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세 사람은 한 번도 대면한 적은 없지만 같은 시기에 겹치는 지역에서 엇갈리는 길을 걸었다. 살아남은 두 사람은 살아남은 자들의 리그에서 승리하여 막강한 권력을 잡았다. 그에 비견하면 일제 패망 3년 전에 산화한 허형식만 안타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는 이육사의 ‘광야’를 떠올린다. 장세윤 박사(전 동북아재단 연구원)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육사의 외당숙인 허형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육사는 고문을 당하면서 피와 고름을 찍어 꾹꾹 눌러 썼을 뿐, 따로 시작 노트를 남긴 것은 없으니 초인이 누구인지는 단언하기는 어렵다.

다시 쑹넌평원의 지평선을 떠올린다. 허형식은 우리의 현대사에서 1940년 전반이란 시기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결절인 것 같다. 만지면 만질수록 아프고, 제대로 치유하지 못해 깊은 흉터로 남았다. 그의 차디찬 죽음, 김일성과 박정희가 어른거리는 뒤엉킨 역사.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 현대사이다. 상처가, 참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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