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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월성 1호기 폐쇄 강요, 청와대가 답할 차례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51호 30면

‘영구 가동 중단 언제?’ 대통령 댓글 이틀뒤

산업부, ‘즉시 가동 중단’으로 방침 급변경

강압 증거 드러났는데도 청와대는 침묵만

문재인 정부는 2017년 5월 출범 직후부터 탈원전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문 대통령은 취임 한 달 뒤인 6월 ‘고리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 참석해 신규원전 건설계획(6기) 전면 백지화 등 탈원전 기본방침을 선언했다. 이 자리에서 “설계수명이 다한 원전(월성 1호기) 가동을 연장하는 것은 선박운항 선령을 연장한 세월호와 같다”고 비유했다. 조기 폐쇄를 공개 선언한 셈이다.

월성 원전 1호기 경제성 평가 조작 혐의 등으로 기소된 백운규 당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공소장 중 ‘산업부 국정 과제 수립 경과’ 항목에 적시된 내용이다. 최근 공개된 101페이지 분량의 공소장을 보면 이 사건의 시작과 정점에 대통령과 청와대가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곳곳에 나와있다. 특히 ‘대통령’ 단어가 46번, ‘문재인’ 단어가 3번 가량, 청와대와 청와대의 영문 이니셜 BH도 수차례 등장한다.

공소장에 따르면 조기 폐쇄 추진 과정은 무법·편법, 찍어누르기의 연속이었다. 원전 운용사인 한수원은 일찌감치 ‘월성 1호기 가동 중단 시 약 1조8000억원 손실이 발생한다’고 결론냈다. 정부가 특별법 제정을 통해 가동 중단 조치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제시했다. 산업부도 원전 비중 확대·축소 같은 중대 사안의 기조 변경은 산업부 단독으로 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원전 비중을 축소하는 쪽으로 2차 에너지 기본계획을 먼저 수정한뒤 한수원에 조기 폐쇄 이행 계획을 요구해야 절차적·내용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법적 절차를 지키지 않으면 배임과 손해배상 책임 소송에 휘말릴 수 있음을 의식한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 담당 참모는 “그런 말 하려면 청와대에 오지 말라”고 강하게 질책하고 묵살했다. 그러자 산업부는 막판에 원전 조기 폐쇄 내용을 담은 ‘설비 현황 조사표’를 작성해 제출하라고 한수원에 요구했다. 원래 건설 의향서를 써야 하는데, 이사회를 회피하기 위해 사실관계만 적으면 되는 조사표를 요구하는 꼼수를 쓴 것이다. 자리 보전 운운하며 인사 불이익 카드로 압박했다. 오죽하면 한수원 간부마저 부하 직원에게 “나는 못하니 당신도 하기 싫으면 휴가를 가라”고 반발했을까.

사태의 변곡점이 된 것은 대통령의 댓글이었다는 게 공소장의 핵심 내용이다. 2018년 4월 2일 청와대 내부 보고 시스템에 ‘월성 1호기 외벽에 철근이 노출되어 정비를 연장한다’는 취지의 과학기술보좌관 보고서가 올라오자, 문 대통령은 ‘월성 1호기의 영구 가동 중단은 언제 결정할 계획인가요’라는 댓글을 남겼다. 다음날 원전 정책을 담당하는 산업부 정모 과장이 ‘월성 원전 추가 가동’ 의견서를 올리자 청와대 김모 행정관이  “이거는 대통령께서 머리 깊이 박혀 있으신 거다”라며 ‘즉시 가동 중단’ 보고서로 바꾸라고 요구했다. 대통령 입맛에 맞게 정반대의 보고서를 올리라는 강압적 요구였다. 이를 보고받은 백 전 장관도 정 과장에게 “너 죽을래”라며 질책하고, 다음날 즉시 가동 중단 보고서를 청와대에 보고했다. 이들에게 국민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임명권자만 보였다. 산업부 방침이 180도로 바뀌는 데 불과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니 기가 막힌다. 청와대 참모와 장관등 고위 공직자는 국민이 낸 세금으로 녹을 먹는 공복(公)이다. 아무리 대통령이 임명했더라도 정책이 잘못됐다면 “노(NO)”라고 말하는 게 공직자의 바른 자세다. 하지만 이들은 국민을 저버리고 정반대의 길로 갔다. 청와대→산업부→한수원으로 책임 떠넘기기식 면피 행정의 결과는 참담하다.

하지만 검찰 수사는 청와대 참모 단계에 멈춰 있다. 새로운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데도 대통령이 여전히 침묵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꼬리 자르기 아니냐는 의심을 살 만하다. 대통령이 답해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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