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흔든 스파이

CIA·FBI에 첩보 제공 소련 장군, 25년간 ‘두더지’ 활동

중앙선데이

입력 2021.08.28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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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1호 22면

[세계를 흔든 스파이] 드미트리 폴랴코프 〈끝〉

역사를 만든 스파이를 꼽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소련의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폴랴코프(1921~88) 장군이다. 소련군 참모본부 정보총국(GRU)의 고위 간부였던 폴랴코프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원해서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에 25년간 초특급 정보를 제공한 ‘거물 두더지(이중 스파이)’였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018년 그를 ‘세계를 구한 다섯 명의 스파이’ 중 한 사람으로 꼽았다.

폴랴코프는 의지와 신념의 스파이였다. 미국 정보기관의 계속된 탈출 제안을 이런 말로 사양했다. “기다리지 말라. 나는 결코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이 일을 한다. 나는 러시아인으로 태어났고, 러시아인으로 죽을 것이다.”

그는 61~86년의 25년간 미국에 정보를 제공하면서도 GRU에서 장군까지 올랐다. CIA는 그의 정보를 최상급으로 평가했다. CIA는 그를 ‘버번’과 ‘로움’이라는 두 가지 암호명으로 불렸다. FBI에선 ‘탑햇’으로 알려졌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인 93~95년 CIA 국장을 지낸 제임스 울시는 그를 “왕관의 보석”이라고 표현했다. 61~71년 FBI의 국내담당 부국장을 지낸 윌리엄 설리번은 그를 서방을 오도하기 위해 가짜 정보를 보내는 삼중 스파이로 의심했다. 폴랴코프가 제공한 정보는 25개 상자 분량으로 방대한 데다 내용이 정확하고 맥을 정확히 짚었기 때문이다.

유흥비 위해 정보 판 MI6 요원 적발에 한몫

25년간 비밀 정보를 미국에 전달한 드미트리 폴랴코프. 작은 사진은 86년 체포되는 장면. [사진=위키피디아]

25년간 비밀 정보를 미국에 전달한 드미트리 폴랴코프. 작은 사진은 86년 체포되는 장면. [사진=위키피디아]

대표적인 사례가 60년대 말과 70년대 초 소련과 중국이 불화하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 주는 정보였다. 당시 미국 정보당국 일각에선 중·소 갈등을 서방에 대한 기만전술로 여겼다. 하지만 폴랴코프의 정보로 이를 확인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미국은 71년 7월 헨리 키신저 국무부 장관에 이어 72년 2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미·중 국교 수립의 물꼬를 텄다. 역사를 만든 정보였다. 미국은 이런 고급 정보를 바탕으로 국제정세를 정확히 판단하고, 중·소 균열의 틈을 파고들어 냉전에서 승리를 거둔 셈이다. 외교에서 정보의 가치를 새삼 실감하게 하는 사례다.

폴랴코프는 60년대 소련이 개발한 대전차 미사일의 기술 자료도 제공했다. 대비가 없었던 미국과 서방은 충격을 받았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73년 욤 키푸르 전쟁에서 혼이 났다. 미국과 서방은 그의 정보를 바탕으로 공간장갑, 폭발반응장갑, 복합장갑, 능동방어시스템 등 다양한 대응 수단을 강구하게 됐다. 90~91년 걸프전 당시 미군과 연합군이 소련제 기갑 무기로 무장한 대규모 지상 전력을 보유한 이라크군과 싸워 군사적으로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것은 이런 고급 군사정보가 바탕이 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폴랴코프의 정보를 바탕으로 서방은 소련의 휴민트(인적 정보자산) 모집과 관리 방법도 파악했으며 여기저기 잠입한 수많은 비밀요원을 색출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 비밀정보부(MI6) 요원으로 유흥비 마련을 위해 소련에 정보를 판 프랭크 보사드의 적발이다. 공군 통신장교 출신인 보사드는 서독 본의 주영대사관에 파견돼 소련을 탈출한 과학기술자를 만나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를 위해 받은 활동비로 유흥생활을 즐기면서 알코올 중독이 됐지만 61년 런던의 본부로 돌아오면서 돈이 궁해졌다. 본에서 보사드를 관찰해 온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들은 서방의 미사일·레이더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보사드의 이런 약점에 주목했다.

런던의 펍에서 몇 차례 마주친 남자로부터 돈과 정보를 맞바꾸자는 제안을 받은 보사드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매달 첫 화요일과 수요일 오전 7시45분과 오후 8시30분에 모스크바 라디오를 듣고 나오는 곡에 따라 각기 다른 행동을 했다. 예로 ‘카츄사’가 나오면 A 무인포스트에 정보를 갖다 두고, ‘볼가강의 배’가 나오면 그날 정보 전달을 중지하는 식이었다. 그는 점심시간에 기밀서류를 들고나와 인근 호텔에서 이를 촬영했다. 촬영장비가 든 손가방은 워털루 기차역의 짐 보관소에 맡겼다가 찾기를 반복했다. 정보전달은 런던 시티구역에 있는 무인포스트 아홉 군데를 이용해 비대면으로 이뤄졌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영국 국내정보부(MI5)는 유흥업소를 과도하게 출입하는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폴랴코프와 또 다른 두더지가 그의 정체를 확인하면서 혐의가 드러났다. 보사드는 21년형을 선고받았다. 폴랴코프의 정보로 25년간 19명의 소련 정보요원, 이들과 협력한 150명의 외국인, 1500명의 서방 협력자를 체포하거나 파악해 감시할 수 있었다.

WSJ ‘세계 구한 다섯 명의 스파이’로 선정

참모본부 정보총국의 고위 간부로 장성까지 오른 폴랴코프가 미국에 정보를 제공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삶을 살펴보자. 그는 2차 대전에서 포병장교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훈장을 받을 만큼 용기와 지략을 보였다. 전후 프룬제 사관학교에서 참모교육을 받은 뒤 GRU에 들어갔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첫 보직은 51~56년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 있는 군사위원회에 소련 대표로 참석하는 일이었다. 59~61년 다시 뉴욕의 유엔본부에 파견된 그는 FBI의 방첩 요원에게 접근해 정보 제공을 제안했다. 그가 정보제공자를 자청한 이유는 소련 지도층의 경직성과 반인륜성, 그리고 부패에 대한 혐오가 자리 잡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유엔본부 근무 중 세 아들 중 첫째가 심하게 아프자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미국 병원에 데리고 갈 수 있도록 상부에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상관은 400달러의 치료비 지원을 거부했다. 결국 아이를 잃으면서 거대한 공산 체제의 모순을 절감하고 자기 방식대로 애국에 나선 것이다.

폴랴코프는 은퇴한 지 6년이 지난 86년 GRU에 체포됐다. 미국 CIA의 정보판매자 올드리치 에임즈가 팔아먹은 정보 때문이었다. CIA는 그에게 위험 징후를 알리거나 탈출을 시도할 수도 없었다. GRU의 정보손실 평가 과정은 혹독했을 것이다.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 어떤 정보를 서방에 제공했는지를 심문받았을 것이다. 결국 87년 11월 27일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데 이어 88년 3월 15일 처형됐다. 처형은 극비로 다뤄져 소련 대중에는 물론 미국 정보기관도 이를 즉시 파악하지 못했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85년 11월 이래 여러 차례 정상회담으로 신뢰가 쌓인 88년 5월 31일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폴랴코프의 인도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천국에서 큰아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의 활동과 처형은 90년대가 돼서야 러시아 대중에 알려졌다. CIA는 그가 금전이 아닌 신념에 따라서 행동한 ‘존경할 만한 이중스파이’로 평가한다.

CIA 요원 에임즈, 돈 받고 폴랴코프 정보 넘겨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보석으로 불린 신념의 이중스파이 드미트리 폴랴코프 장군의 신상을 소련에 제공해 죽음에 이르게 한 CIA 요원 올드리치 에임즈는 미국 정보 분야 역사상 최악의 인물로 통한다. 미국 연방정보국(FBI) 사이트의 역사 부문은 에임즈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고 솔직하게 다룬다.

소련과 러시아의 스파이를 색출하는 것이 임무였지만, 그 자신이 돈을 받고 적에 정보를 파는 이중간첩으로 전락했다. 소련에 돈을 받고 판 정보로 적어도 10명의 소련 내 CIA 정보원이 체포돼 처형됐다. 에임즈의 배신행위는 1991년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로 바뀐 다음에도 계속됐다. 그는 이념이 아니라 ‘돈을 사랑한 스파이’였다. 그는 94년 2월 21일 버지니아주 알링턴에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됐다.

에임즈는 85년부터 부인 마리아의 도움을 받으며 미국의 정보를 KGB에 팔기 시작했다. 그해 랭글리(CIA 본부)의 소련·동유럽국에 배치된 그는 비밀리에 워싱턴의 소련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KGB 요원과 접촉해 협력 의사를 밝혔다. 얼마 뒤 KGB는 그에게 5만 달러를 건넸다.

그해 여름부터 소련 외교관들과 수시로 접촉하면서 CIA와 FBI의 인사 부문의 비밀 정보를 넘겼다. 소련을 상대로 정보를 수집할 때 사용하는 기법에 대한 정보도 제공했다. 올드리치와 마리아 에임즈 부부가 소련과 러시아에서 받은 돈은 모두 270만 달러 정도로 알려졌다. 소련과 러시아가 자신들에게 정보를 넘긴 대가로 미국 두더지 한 마리에 치른 돈 중 최대 규모로 알려졌다. 에임스는 이 돈으로 주택을 현찰로 구입하고 영화 속 007이 타는 재규어 자동차를 몰았다. 그야말로 도둑에게 금고를 맡긴 격이었다.

재판 결과 에임즈는 감형이나 사면 없는 종신형이 선고됐으며, 부인은 탈세와 스파이 혐의로 63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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