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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체의 패션화…사용 목적따라 ‘다른 글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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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1호 21면

글자 속의 우주

글자 속의 우주

글자 속의 우주 한동훈 지음, 호밀밭

“나 지금 궁서체다.” 요즘 10~20대가 진지하다는 표현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다. 궁서체는 과거 궁에서 쓰기 시작해 발전한 서체로 흔히 붓글씨 형태로도 불린다.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에서 풍기는 글꼴의 중후함과 묵의 묵직함이 요즘 젊은이들에게 ‘진지 그 자체’로 느껴진 셈이다. 글 내용보다 상대적으로 놓치기 쉬운 글의 모양이 상대방을 일갈하는 데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서체 디자이너인 저자는 글자꼴이 “단순한 정보 전달기능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글귀가 드러내고자 하는 분위기까지 암시한다”며 글 외피의 힘을 강조했다. 음식의 색감과 온도에 따라 담는 그릇이 달라지듯, 어떤 독자를 의식해 어떻게 글을 쓰냐에 따라 서체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다양해진다. 깔끔한 내용은 깔끔한 서체로, 복잡한 내용은 복잡한 서체로 글을 담아내야 인지 부조화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글자꼴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글귀가 드러내려는 분위기까지 암시한다. [사진 호밀밭]

글자꼴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글귀가 드러내려는 분위기까지 암시한다. [사진 호밀밭]

커피전문점에 걸린 메뉴판을 생각해보자. 직원이 분필을 이용해 직접 적은 글씨부터 둥글둥글한 느낌의 폰트까지 메뉴판 글 모양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손님의 시선이 집중되다 보니 카페마다 가진 콘셉트와 감수성이 메뉴판 글 디자인에 고스란히 응축된다. 이와 달리 동네 골목에 있는 치킨 가게나호프집은 아주 굵고 균질하지 못한 글자로 간판을 세운다. 강렬한 인상과 시원시원한 글자 모양을 통해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기 위해서다.

미니홈피는 글꼴을 상업적으로 이용해 성공한 대표적인 예다. 10여년 전 인터넷 이용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미니홈피는 지금의 SNS처럼 주인장의 생각과 심리를 타인에게 전하는 매개체였다. ‘HY잠수중’ 폰트로 써진 다이어리 글과 슬픈 배경음악(BGM)은 주인장의 이별을 암시한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주인장이라면 ‘HY아이스하트’ 폰트를 이용해 글마다 하트가 난무하기 마련이었다. 남들과 다른 독특한 글씨체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글자 모양에 비용을 지불했다.

글자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게 아니다. 사용 목적에 따라 쓰이는 글자가 엄연히 구분된다. 폰트는 ‘글’을 다룰 때 쓰인다. 한글과 외국어, 특수문자 등이 동일한 모양을 유지하는 게 특징이기 때문에 주로 문서 작업에서 활용된다. 반면 레터링은 필요한 몇 글자에 최적화된 디자인을 뜻한다. 표어, 문구 등 짤막한 글귀를 적을 때 안성맞춤이다. 취미 활동으로도 많이 찾는 캘리그래피는 육필을 통해 글자에 디자인을 새겨 넣는 서체이다. 글자에 그림을 불어넣는 효과 덕분에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많이 쓰인다.

저자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글자들을 차곡차곡 모았다. 글꼴도 패션처럼 유행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음식점 간판, 맥주병 라벨, 지폐, 도로 위 표지판 등 분야에 상관없이 글이 새겨진 것이라면 뭐든지 기록했다. 그리고 그 변화를 『글자 속의 우주』에 담았다. TV 예능프로그램 자막처럼 변화를 거듭하는 글꼴이 있지만 공공시설 표시판은 수십 년째 같은 글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글의 시작은 글자에서 비롯된다는 저자의 철학이 긴 시간 동안 수집해온 글자들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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