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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V속 멀티탭 불빛에 딱 걸렸다···2.7억 노린 ‘완벽 사기’[요지경 보험사기]

중앙일보

입력

[요지경 보험사기]

알리바이는 완벽했다. 발화 시점 1분 37초 전 들어온 멀티탭 빨간 전원 표시 불빛만 아니었다면, A씨는 화재 보험금 2억7000만원을 받았을 것이다. 타이머 스위치와 공업용 히팅건을 이용한 A씨의 방화 보험사기는 폐쇄회로(CC)TV에 찍힌 빨간 불빛 하나에 덜미가 잡혔다.

화재 이미지 그래픽

화재 이미지 그래픽

2019년 3월 1일 오후 11시, 강원도 강릉시의 B자동차공업사에서 불이 났다. 화재는 2층짜리 공업사의 작업공간을 완전히 태웠다. 불이 났을 때 공업사에는 사람이 없어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해당 사건을 처음 수사한 경찰도 방화 등에 대해 무혐의로 사건을 종결했다.

단순 화재로 끝날 뻔한 사건의 불씨를 살린 건 KB손해보험 보험사기특별조사팀(SIU)이다. SIU가 보험사기를 위한 방화를 의심한 이유는 공업사 곳곳에 붙어있던 압류장과 수도요금 미납 관련 고지서였다.

B공업사는 2018년 10월부터 5개월간 상하수도요금 11만5580원을 내지 못해 단수 처리될 정도로 경영상황이 좋지 않았다. 임대료 미납으로 건물주와의 소송에서도 져 정비공장 내 비품에 압류장이 붙어있었다. 재정압박에 관한 각종 자료는 방화를 의심하는 증거가 됐다. 미납했던 석 달 치 보험료 64만원을 화재 두 달 전 납부하며 화재보험계약 효력을 부활시킨 것도 수상쩍었다.

 KB손보는 A씨의 동의를 받아 경찰에서 화재 당일 CCTV를 확인했다. A씨가 떠난 후 꺼져있던 멀티탭의 전원표시등이 화재 직전 켜지는 걸 확인했다. KB손보 제공

KB손보는 A씨의 동의를 받아 경찰에서 화재 당일 CCTV를 확인했다. A씨가 떠난 후 꺼져있던 멀티탭의 전원표시등이 화재 직전 켜지는 걸 확인했다. KB손보 제공

SIU가 가졌던 단서는 A씨가 보험금 청구를 위한 조사 과정에서 언급했던 ‘타이머’와 ‘히팅건’ 두 단어였다. 디지털 타이머 스위치는 1분 단위로 작동시간을 설정해 특정 시간에 맞춰 전원을 켜고 끌 수 있다. 히팅건은 플라스틱 성형이나 도색 열처리 등에 사용되는 전동공구로 섭씨 수백도의 뜨거운 열풍을 쏜다.

SIU 일대의 건자재 가게를 탐문해 공업사 대표가 화재 당일 디지털 타이머 스위치를 산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경찰을 통해 사건 당일 공업사에 설치된 하루 치 폐쇄회로(CC)TV를 확인해 그날의 사건을 재구성했다.

A씨는 이날 오후 5시 16분 창고에서 히팅건을 꺼내 발화 지점으로 갔다. 이후 5분간 발화지점에 머무르며 모종의 작업을 했다. 히팅건을 멀티탭에 연결한 작업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CCTV에는 멀티탭의 빨간 전원표시등이 선명히 들어와 있었다. 멀티탭의 빨간 불빛은 5시 23분 사라졌다. A씨가 발화 지점을 빠져나오기 직전이다. A씨는 5시 27분 공업사를 완전히 떠났다.

멀티탭의 전원표시등에 불이 들어온 건 오후 11시 10분 무렵이다. 멀티탭에 연결된 디지털 타이머 스위치가 작동하며 멀티탭에 전원이 공급됐다. 멀티탭에 꽂혀있던 히팅건도 이때 작동했다. 정확히 1분 37초가 지난 뒤 공업사에 불이 났다. 해당 영상을 본 SIU는 '타이머를 이용해 아무도 없는 공업사에서 전기적 요인으로 발생한 화재로 위장한 방화사건'으로 내부 결론을 냈다.

화재보험협회 방재시험연구원에서 진행한 실험. 화재 현장에서 사용된 디지털 타이머와 히팅건과 유사한 제품을 사용해 발화 시간 등을 측정했다. KB손보 제공

화재보험협회 방재시험연구원에서 진행한 실험. 화재 현장에서 사용된 디지털 타이머와 히팅건과 유사한 제품을 사용해 발화 시간 등을 측정했다. KB손보 제공

SIU는 방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화재보험협회 방재시험연구원에서 실험도 진행했다. A씨가 사용한 히팅건과 가장 유사한 제품을 골라 공업사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에어필터와 엔진오일, 기름장갑 및 목장갑 등에 불이 붙는지를 확인했다. 화재 현장에서도 목장갑과 같은 섬유의 흔적과 함께 휘발유 등 액체 가연물의 흔적이 발견됐다.

실험에서는 히팅건이 작동된 뒤 1분 27초 만에 불이 붙었다. CCTV 영상자료에도 히팅건이 작동한 후 1분 37초 만에 불이 붙었다. 엔진오일 등에는 불이 붙지 않았다. KB손보 안재원 조사실장은 “연구소에서 사고 현장을 재현한 실험을 통해 단순히 기름만 있을 경우 불이 붙지 않고 기름장갑 등을 놔둬야 불이 붙는다는 걸 확인했다”고 말했다.

SIU는 이런 증거를 모아 경찰에 제출했고, 검찰과 경찰은 수사 끝에 A씨가 보험사기를 저지르기 위해 방화를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A씨는 지난해 12월 보험사기와 방화 등의 혐의로 불구속기소 돼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검찰은 A씨에게 징역 4년을 구형한 상태다. 해당 업체 대표는 재판에서 "타이머 스위치를 실수로 조작해 불이 났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KB손보 SIU 관계자는 “공업사에서 타이머 스위치를 잘 사용하지 않는 데다, 사고 당일에는 작업등을 충전하지 않았다”며 “설령 조작 실수라고 하더라도 타이머에 설정 시간이 불이 난 오후 11시 10분인 아닌 오전 0시로 맞춰지게 돼 있어 A씨의 주장에는 허점이 많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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