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장강명 “언론중재법, 단순 유치한 어린아이 세계관의 악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보이스 인터뷰’ 외 더 많은 상품도 함께 구독해보세요.

도 함께 구독하시겠어요?

“언론중재법은 ‘86그룹’과 율사(律士) 출신 초선의원들의 어린아이 같은 세계관이 만든 황당한 악법이다.”

소설가 장강명(46)은 초읽기에 들어간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언론중재법)을 이렇게 비판한다. 그는 “입법을 주도한 이들의 이분법적인 단순하고 유치한 세계관이 악법 탄생의 배경”이라고 꼬집는다. 언론중재법에 대한 매서운 비판은 그가 기자 출신이라서일까 싶지만, 그는 줄곧 현실 비판을 소설에 담아왔다. 6년 전 나온 두 소설 ‘한국이 싫어서’, ‘댓글 부대’는 2030 청년 문제, 국정원 댓글 사건을 각각 녹여냈다. 지난 26일 제8회 심훈문학대상을 받은 단편 소설 ‘당신이 보고 싶어 하는 세상’은 대선 불복과 증강현실을 다뤘다. 그는 이 단편 소설처럼 개인맞춤형 미디어를 통한 정치적 불복이 일상화할 거라고 봤다. 이런 일이 언론중재법과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지난 24일 장강명(46) 작가가 중앙일보와 인터뷰 하고 있다. 정수경PD

지난 24일 장강명(46) 작가가 중앙일보와 인터뷰 하고 있다. 정수경PD

그간 사회성 짙은 소설을 썼다.
사회 시스템과 그 작동방식에 관심 많다. 전직(기자) 영향도 있겠지만, 기자가 되기 전부터 성향이 그랬던 것 같다. 소설에도 그런 게 반영됐다.  
소설가로서 시사 칼럼 쓰는 건 부담 없나.
많다. ‘자격’ 고민도 있다. 사회와 관련된 공부를 한 것도 아니다. 공대를 나와 10여년 기자 생활하고 소설을 쓴 게 전부인데 ‘한국 사회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를 자주 생각한다. 그래서 잘 모르는 주제는 함부로 다루지 않으려 한다. 다만 정치평론을 하고 싶진 않다. 시사 칼럼이 정치컨설팅은 아니지 않나. 한국 사회 경향성이나 나아갈 방향을 다루고 싶다.
소설에서 다뤄온 청년·댓글조작 문제, 여전히 유효하다.  
쉽게 해결 안 되는 문제라서 그런 것 아닐까. 소설도 칼럼도 유행하는 트렌드나 소재는 있지만, 거기에 너무 관심 갖지 않으려 한다.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고 사라지는 밈(Meme)들이 많은데, 그보다는 의미 있는 물결들, 조류 같은 것을 붙잡고 싶다.
올해 심훈문학대상 수상작에선 대선 불복과 증강현실을 다뤘다. 요즘 관심사인가.
요즘 나를 사로잡는 주제다. 매스 미디어가 몰락했고, 그 자리를 개인맞춤형 미디어들이 채우고 있다. 그 변화에 관심이 많아서 논픽션을 준비 중인데 때마침 단편소설 쓸 자리를 얻었고 몇 가지 아이디어로 소품(小品)을 썼다. SF 형식이고 요즘 한국 문학계가 반기는 주제나 소재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문학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전혀 기대 안 했는데 받았다.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싶었다.
소설처럼 선거 불복이 일상화된 세상이 올까.  
그럴 것 같다. 사실 ‘불복’은 모든 패배자의 오래된 욕망이었다. 근데 수단이 없었다. 혼자 정신승리를 하며 살 순 있지만, 증세가 심하면 주변 사람들이 정신과 의사에게 보냈겠지. 근데 이제 개인맞춤형 미디어 시대가 열렸고 기술이 더 발전하면 증강현실이나 개인 미디어로 만든 가상현실 속에서 뜻이 맞는 사람끼리 모여 안전하게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보고 싶은 세상만 보여주는 개인 미디어

pixabay.

pixabay.

실제 유튜브를 보다보면 각자 믿는 세상을 살고 있다.
곳곳에서 ‘부족(部族)’들이 생겨나는 것 같다. 극우도 그렇고 극좌도 그렇고, 정치랑 상관없는 취향들로 뭉친 새로운 집단들도 많다. 인터넷과 SNS가 사람을 연결하는 방식을 바꿨다. 그 덕에 이런 부족들이 힘을 얻는다. 보편규칙보다 ‘부족’의 논리를 우선하는 집단들이 의미 있는 세력이 되면서 기존 틀로 잘 분석이 되지 않는 갈등이 표면으로 올라온다. 가령 ‘인터넷에서만 벌어지는 것 같던 싸움’이 결국 현실 세계를 잡아먹게 된다. 지금 젠더 갈등이 그런 양상이다.  
이런 개인 미디어가 정치체제까지 위협할까.  
큰 위협이 될 거라고 본다. 대의민주주의와 의회정치는 매스 미디어와 관련이 깊다. 사람들은 꼭 선거를 통하지 않고도 여론을 형성해 의회에 의견을 내지 않나. 매스 미디어는 정치와 시민을 잇는 중요한 통로였다. 그래서 미디어 종사자들은 고도의 도덕적 긴장감을 요구받았다. 언론인들이 배우고 지켜온 저널리즘 윤리는 대부분 매스 미디어라는 매체를 전제로 한 윤리다. 그런데 개인 맞춤형 미디어는 아직 저널리즘 윤리라고 부를 만한 게 없다. 대의민주주의를 지켜온 기둥 하나가 무너지는 중이라는 얘기다. 가령 시사 유튜버들이 그 윤리를 따르거나, 배우지는 않는다. 지금 유튜브 등은 저널리즘 윤리와 상관없는 일종의 무법지대다.      
매스 미디어는 정치와 시민을 잇는 중요한 통로였으며 대의민주주의를 지켜온 기둥이다. 조은재PD

매스 미디어는 정치와 시민을 잇는 중요한 통로였으며 대의민주주의를 지켜온 기둥이다. 조은재PD

“단순 과격한 어린아이 세계관이 만든 언론중재법”

 그런데 언론중재법은 1인 미디어가 아니라 기성 언론을 겨냥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악법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각도에서 문제가 너무 많다. 저널리즘 윤리를 회복시키는 게 아니라 그 기능을 마비시킬 것이다. 황당하고 무서운 법안이다.  
언론 자정을 위해 법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한국 언론이 반성할 지점도 물론 많다. 하지만 아주 근본적으로 보면, 저널리즘 윤리라는 건 도달 불가능한 판타지와 같다. 사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과제다. ‘성불(成佛)’ 같은 개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언론에 ‘신속’과 ‘정확’을 요구한다. 그런데 어떻게 늘 신속하고 정확할 수 있을까. 신속하면 부정확해지고, 정확하면 느려진다. 그런데 우리 요구 사항은 그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언론에 균형감각도 요구하고, 대안을 제시하라고 하고, 사회적 약자도 배려해주길 바란다. 이런 걸 실패할 때마다 언론은 욕을 먹는다. 그래서 ‘한번 갈아엎어야 바뀌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아진 것 같다.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법사위 회의실 앞에서 여당의 언론중재법 강행을 규탄하는 팻말을 들고 발언하고 있다.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법사위 회의실 앞에서 여당의 언론중재법 강행을 규탄하는 팻말을 들고 발언하고 있다.

여당이 입법 강행한 건 이런 언론에 경고할 때라고 본 걸까.
여당이나 집권 세력이 그 정도로 정교한 기획을 하는 사람들이 아닌 것 같다. 언론중재법 이전에도 임대차보호법 등을 보면 국정운영 능력 자체가 서툴고 미성숙하다. (입법을 주도한) 소위 ‘86그룹’들이나 율사 출신 초선 의원들이 세상을 단순하게 본다. 세상에 선인과 악인이 있고, 악인을 벌주고 제거하면 세상이 좋아질 거란 세계관, 어린아이의 세계관이고, 단순한 세계관이다. 율사 출신들은 법률에 맞춰 옳고 그름, 불법과 합법을 판단하는 훈련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라 세계관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닐까 싶다. 언론중재법도 그런 순진하고 과격한 기대 속에 나온 산물이라고 본다. 부작용이 엄청날 텐데 이 법을 만든 분들이 책임질 수 있을까 싶다. 안타깝고 슬프다. 이런 단순한 세계관을 갖게 되면 구호가 과격해진다. 야당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이 나아갈 바를 ‘상식’ ‘공정’ 같은 몇 마디에 담는다. 상식만 지키면 대한민국이 저절로 잘 돌아가고, 중국과의 외교도 잘 되고, 인공지능의 파고도 잘 넘을 것이고, 중산층 붕괴도 막을 수 있나. 태극기 드신 분들부터 전 법무부 장관을 수호해야 한다는 분들까지. 단순하고 과격하고 유치한 세계관이 한국의 여러 ‘부족’들을 사로잡는 중이다.
율사 출신 정치인들이 문제인가.  
아니 뭐 율사 출신이 문제… 언론인 출신들도 문제 많던데. (웃음) 언론 경력 오래된 분이 언론중재법에 깃발 하나 꽂고 계시던데. 정치인과 직업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근본적으로 직업 정치인 멸시가 가장 문제다. 협상하고 타협하는 게 직업 정치인의 일이다. 율사 출신도 2~3선 하면 타협을 배운다. 재판장에서, 검사석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게 아니라, 멱살도 잡혀가면서 ‘사회라는 게 참 복잡하구나’ 배우지 않나. 근데 한국의 정치혐오는 도를 넘어섰다. ‘한국 사회 실패는 정치 탓이니 이걸 바로잡으면 된다’면서 정당들이 구세주 모시듯 외부인을 영입한다. 구조를 손대지 않고 사람만 바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이 퍼진다. 본격적으로 나타난 게 안철수 현상이다. 이후 모든 선거마다 정당이 중심이 되지 못하고 외부영입 인사, 명망가를 영입해 간판으로 내세워서 정치 혐오를 비껴가려는 전략을 편다. 그분들이 간판은 좋을지언정 결국 유능한 정치인들은 아니었지 않나.
최근 한국의 정당들은 모든 선거마다 스스로 중심이 되지 못한 채 외부인사를 내세워 정치 혐오를 비껴가려는 전략을 펼친다. 조은재PD

최근 한국의 정당들은 모든 선거마다 스스로 중심이 되지 못한 채 외부인사를 내세워 정치 혐오를 비껴가려는 전략을 펼친다. 조은재PD

‘기술 발전’이란 ‘거대한 쓰나미’가 언론을 덮쳤다  

미디어 혐오, 자정 노력만으로 극복될까.
기자 개개인이 더 강한 윤리의식으로 무장해서 좋은 기사를 쓴다고 매스미디어 몰락이나 언론 혐오를 막을 수 있을까.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저널리즘 윤리의식을 내팽개치자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기술 변화다. 개인 맞춤화된 미디어 플랫폼은 담긴 자극적이고 수준이 떨어지는 내용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우리 대부분에게는 그게 편하고 쉽고 좋으니까. 한 언론사나 기자 한 사람이 노력한다고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기술이 가져온 거대한 쓰나미다. 이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발상은 인간 본성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떡볶이가 몸에 안 좋다. 채소를 많이 먹어라’고 아무리 말해도 떡볶이를 더 좋아하는 게 인간 아닌가.  
청와대 춘추관. 뉴스1

청와대 춘추관. 뉴스1

‘기분’이 지배하는 사회, 진보와 보수의 나아갈 길은

‘기분’이 지배하는 사회, ‘팬덤’ 정치를 만들었다고 칼럼을 썼다.
팬덤보다 넓은 개념으로 부족이란 표현을 썼다. 팬덤이 아닌 부족도 있으니까. 이들이 점점 정치·사회적 실체가 되어간다. 의회정치도 많이 잠식됐다. 과거 영향력이 적었던 극성 지지층이 이제 제도권 정당을 호령한다. 기성 정당이 이들 눈치를 보는 지경이다. ‘부족 현상과 신기술이 결합해 새로운 정치시스템을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건 너무 낙관적인 기대 아닐까.  
팬덤 정치, 즉 '부족' 정치의 출현은 의회 정치 시스템마저 잠식한다. 조은재PD

팬덤 정치, 즉 '부족' 정치의 출현은 의회 정치 시스템마저 잠식한다. 조은재PD

한 인터뷰에서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했다.  
진보와 보수 차이는 방향이 아닌 속도 차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우리가 달성할 사회에 대해 생각이 같더라도 그걸 ‘내일 당장 이루겠다’는 사람과 ‘10년 안에 이루겠다’는 사람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가슴에 피가 끓는 분들은 ‘그 과정을 대충 줄이고, 빨리 세상을 구해보자’는 지름길에 대한 유혹을 많이 받는다. 20세기 큰 비극들이 그런 성급한 사회 공학들에서 나왔다. 공산주의 실패가 대표적이다. 그런 사회적 실험에 대해 남들보다 신중한 편인 것 같다. 겁이 많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하지만 개혁은 꼭 필요하고 실험도 많이 벌어야 한다. 변화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건 수구다. 노선에 따라 수구 좌파도 있고, 수구 우파도 있다.
진보와 보수, 궁극적인 목표가 다른가.
건전한 진보주의자들이 원하는 세상과 내가 원하는 세상이 겹치는 경우가 많다. 난 사회민주주의를 긍정적으로 본다. 한국도 그런 사회를 목표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개혁에 성공하면 진보주의자들이 역사의 승자가 되고, 공을 다 가져가겠지. 보수주의자는 그들을 부러워하며 살 운명인 것 같다. 하지만 건강한 보수주의자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해진다고 본다. 과거보다 더 복잡하고 연약한 세상에서 더 파괴적인 힘을 지니고 살기 때문이다. 같은 목표를 향해 진보주의자가 가속페달을 밟고, 보수주의자들이 감속 페달을 밟는 게 좋다. 바라는 세상으로 가는 길이 안전해야 하지 않겠나.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