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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발상] 고대 한반도는 정치 난민의 '집합소'였다?

중앙일보

입력

뮤지컬 미스사이공.

뮤지컬 미스사이공.

철망이 쳐진 미국 대사관 안을 향해 살려달라고 외치는 사람들과 매정하게 떠나는 헬리콥터. 전쟁의 비극을 담아낸 뮤지컬 '미스사이공'에서 백미로 꼽히는 장면입니다. 미군 크리스와 베트남 여성 킴도 갑작스런 이별을 하게 되지요.

15일 아비규환이 된 카불 공항의 혼란상을 보면서 사이공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영국의 탐사저널리스트 스테판 시마노위츠도 자신의 트위터에 2021년 카불의 미국 대사관에서 헬리콥터로 탈출하는 사진과 1975년 사이공에서의 그것을 나란히 실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카불 국제공항에서 아프가니스탄 피난민들이 미 공군기를 쫓아가며 탈출 시도를 하고 있다. 트위터 영상 갈무리

카불 국제공항에서 아프가니스탄 피난민들이 미 공군기를 쫓아가며 탈출 시도를 하고 있다. 트위터 영상 갈무리

영국 저널리스트 스테판 시마노위츠가 15일 올린 사이공과 카불 비교 [트위터 캡쳐]

영국 저널리스트 스테판 시마노위츠가 15일 올린 사이공과 카불 비교 [트위터 캡쳐]

다만 1975년 사이공과는 차이도 있습니다. 당시엔 미국에 협력하거나 반동분자로 몰린 남베트남인들 다수가 숙청되거나 '보트피플' 신세가 된 반면 이번엔 아프간인들 중 많은 수가 협조했던 국가의 도움으로 함께 안전하게 철수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여전히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27일 뉴욕타임스는 이날까지 미국인과 아프간인 약 8만2300명의 인원을 철수시켰는데, 미국에 협조한 25만명 가량의 아프간인들이 아직 남아있다고 보도했습니다.)

한국을 도운 391명의 아프간인도 '미라클'로 명명된 군사작전으로 26일 한국땅을 밟았습니다. 탈레반의 폭정과 보복을 피해 한국행을 선택한 이들입니다. 2018년 예멘 내전 당시 난민 수용 때의 논란과 달리 이번엔 비교적 여론도 우호적입니다. 한국을 도운 이들은 마땅히 도와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 덕분입니다. 정부는 "난민이 아니라 특별공로자"라고 강조하지만 아프간의 상황을 감안하면 사실상 정치적 난민인 셈이죠. 그래서 이번 일을 계기로 난민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기를 기대하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사실 한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출발점에서부터 정치 난민을 빼놓고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 정부에 협력한 아프가니스탄 현지인 및 직계 가족들이 26일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하고 있다. 정부는 이날 한국에 입국한 이들에게 난민이 아닌 특별공로자 자격을 부여하고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 6주가량 수용할 방침이다. 2021.8.26 김상선 기자

우리 정부에 협력한 아프가니스탄 현지인 및 직계 가족들이 26일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하고 있다. 정부는 이날 한국에 입국한 이들에게 난민이 아닌 특별공로자 자격을 부여하고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 6주가량 수용할 방침이다. 2021.8.26 김상선 기자

한국사 최초의 정치적 난민은 누구?
사서에 기록된 최초의 정치 난민은 진시황을 피해 온 중국인 무리입니다. 진시황이 만리장성 공사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자 고역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중국인 수 만명이 '자유'를 찾아 한반도로 건너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진(晉)나라 때 진수가 쓴 역사서 『삼국지(三國志)』 「한전(韓專)」에는 “진한의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며 말하기를 ‘우리는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秦)나라의 고역(苦役)을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왔다. 마한(馬韓)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해 우리에게 주었다’고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시황 시절 혹독했던 만리장성 공사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지금의 경상도 지역에 정착했다는 것이죠. 꾸며냈다고 보기엔 흥미로운 내용이 있습니다. “진한의 말은 마한과 달라서 나라(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弓)을 호(弧)라 하고 도적(賊)을 구(寇)라고 한다. 서로 부르는 것을 모두 도(徒)라 하여 진(秦)나라 사람들과 흡사하니… 지금도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고대에는 피휘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황제나 왕의 이름을 쓸 수 없도록 한 것이죠. 중국에서는 진나라 때까지만 해도 나라를 의미하는 한자로 방(邦)을 썼습니다. 그런데 유방이 한(漢)나라를 건국하면서 그 이름을 쓸 수 없어 방(邦) 대신 국(國)을 쓰게 됐습니다. 그런데 진한에서는 여전히 방(邦)을 썼다고 하니 언어학적으로 따져보면 진나라 유민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삼국사기』에서도 “중국 사람 중 진나라의 난리를 견디지 못하고 동쪽으로 온 자가 많았는데, 마한의 동쪽에 많이 살면서 진한과 섞여 살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한 시대 영역

삼한 시대 영역

길이 6300㎞에 이르는 만리장성. [중앙포토]

길이 6300㎞에 이르는 만리장성. [중앙포토]

위만·석탈해·처용 
언제나 두팔 벌려 환영만 받은 것은 아닙니다. 또 때로는 뒷통수를 단단히 맞기도 했습니다.
유방이 한(漢)나라를 건국했을 때 중국은 또 한번 정치적 혼란기를 맞이합니다. 이무렵 찾아온 것이 위만입니다. 연(燕)나라 출신인 그는 1000여명을 데리고 망명을 신청했고, 고조선의 준왕은 그에게 서쪽 변경 100리의 땅을 떼어줬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위만은 무리를 모아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습니다.

신라의 4대왕이 된 석탈해도 해외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석탈해는 왜국(倭國) 동북쪽 1천리 떨어진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왕의 아내가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버리게 했다. 왕비는 비단에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웠다. 처음에 금관가야 해변에 이르렀는데 금관인들이 괴이 여겨 취하지 않았고, 다시 진한(辰韓) 아진포구(阿珍浦口)에 닿았다…해변에 노파가 줄로 당겨 해안에 매어놓고 궤짝을 열어 보니 작은 아이가 있어 거두어 길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알에서 태어났는데 상서롭지 못하다고 버리게 했다는 기록은 정치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보여줍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가 처음에 간 곳은 신라가 아니라 금관가야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석탈해와 김수로의 대결을 묘사한 부조 [사진 김해시청]

석탈해와 김수로의 대결을 묘사한 부조 [사진 김해시청]

“(탈해가) 흔연히 대궐에 들어가서 (수로)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왕위를 뺏으려고 왔다 하였다…삽시간에 탈해가 매가 되니 수로왕은 독수리가 되었고 탈해가 또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변하였다…탈해가 이에 항복해 말하기를 '내가 죽음을 면한 것은 대개 성인이 죽이기를 싫어하는 인덕의 소치라 내가 왕과 더불어 다툼이 실로 어렵다' 하고 곧 절을 하고 나갔다. (수로)왕은 그가 체류하여 난을 꾸밀까 염려하여 급히 배 500척으로 쫓으니. 탈해가 계림으로 달아나므로 돌아왔다.” (『삼국유사』-「가락국기」)
하지만 이런 김수로도 인도에서 온 허황옥 세력과 연대해 금관가야를 세워 나갔습니다.

석탈해가 태어난 다파나국이 어디인지를 두고 설이 분분했는데, 최근 주목을 받는 지역은 시베리아 캄차카 반도입니다. 이곳에 석탈해 이야기와 비슷한 설화가 있고, 철을 다루는 야장을 ‘tarxad’ 혹은 ‘tarquan’이라고 했는데, ‘탈해’라는 발음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또 석탈해의 특이한 외모도 이런 추정에 힘을 싣습니다. “이름을 탈해라 하였는데, 신장이 3척이요 머리둘레가 1척이었다.” (『삼국유사』) ”너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고 골상(骨相)이 특이하니…” (『삼국사기』)

 『쿠쉬나메』에 그려진 아비틴 관련 삽화 [중앙포토]

『쿠쉬나메』에 그려진 아비틴 관련 삽화 [중앙포토]

신라 헌강왕 때 집에서 역신(疫神)을 쫓아낸 처용 역시 정치적 망명을 선택한 페르시아인이라는 연구도 있습니다. 이란에 전해져 내려온 중세 서사시 『쿠쉬나메』에 따르면 페르시아가 이슬람 제국에 멸망하자 마지막 왕자 아비틴은 바실라(신라)로 피신해 신라 공주 프라랑과 결혼해 파리둔을 얻었다는데 아비틴이 바로 처용이라는 것이죠.
중국 당나라 때 있었던 황소의 난(875~884)이 모티브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황소의 반란군이 중국 최대의 무역도시 광저우를 점령했을 때 당시 많은 학살이 벌어졌고, 외국인들의 탈출 러시가 이어졌습니다. 마침 처용이 신라에 나타난 것은 879년(헌강왕 5년)으로 황소의 난과 비슷한 시기입니다. 페르시아는 당시 의학이 가장 발달한 곳이었는데, 처용이 역신을 퇴치한 것도 그 덕분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아프간전과 베트남전, 그리고 6·25 
베트남전과 아프간전은 닮은면이 있습니다. 미국의 풍족한 지원을 받은 정부군이 패배했다는 점입니다.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민심 이반과 군대의 낮은 사기가 거론됩니다. '민족', '해방', '외세(미제)' 등을 앞세운 베트콩과 탈레반은 열세의 상황에서 결국 승리했습니다.

그렇다면 6·25 전쟁에서는 왜 '민족' '해방 '미제'를 앞세운 북한이 승리하지 못했을까요. 물론 초기엔 승승장구했습니다. 수도 서울은 3일만에 점령됐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일단 북한군은 한강을 도하하는데 5일이 넘게 걸렸습니다. 한강 도하작전에서 사망 227명, 부상 1822명, 실종 107명. 파죽지세로 밀고오던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낙동강 전선에 도착한 것은 8월 5일입니다. 전쟁 개시부터 41일 걸렸습니다. 한국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죠.

 북한 김일성 주석이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모습 [연합뉴스]

북한 김일성 주석이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모습 [연합뉴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큰 요인은 병력 충원입니다. 1950년 8월 한국은 9만1000명의 병력을 확보해 전쟁 전 수준을 거의 회복했습니다. 북한군 9만8000명과 별 차이가 없는 규모입니다.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전국이 북한에 넘어간 상황이었음에도, 한국 정부의 행정력이 여전히 작동했고, 민심도 크게 이반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전쟁 전 북한의 박헌영은 "전쟁이 나면 남한에서 20만명 가까이 폭동을 일으켜 호응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은 1963년 인민군 창설 15주년 기념 연설에서 “대구에서 부산까지는 지척인데 만일 부산에서 노동자들이 몇천 명 일어나서 시위만 했더라도 문제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남반부 인민들이 조금만 들고일어났더라면 우리는 부산까지 해방하고 미국놈들은 상륙하지 못했을 겁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친일파가 주도해 건국했고 민심은 이반해있었다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의 서술과는 다른 상황인 것이죠. 왜 그랬을까요.

북한군의 남하에 대응해 국군과 유엔군이 구축한 낙동강전선 부도

북한군의 남하에 대응해 국군과 유엔군이 구축한 낙동강전선 부도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며 내세운 것은 '해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남한에 진주한 뒤 봉건지주로부터 땅을 나눠주겠다고 크게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승만 정부도 1949~1950년 '유상몰수, 유상분배' 형식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완료된 시점이었습니다. '약발'이 먹혀들기는 어려웠던 것이죠. 충북 지역에서 북한이 실시한 토지 분배 자료를 보면 1가구 당 0.36정보를 분배했는데 이는 이승만 정부 때의 0.38정보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경기 파주 등에선 "토지개혁의 분위기가 전혀 조성되지 않는다"는 보고가 올라올 정도였습니다.

또 북한은 농업지대도 적은데다가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이미 7월부터 식량확보에 차질을 빚습니다. 이를 농민들의 현물세로 채우려 했는데 낱알 하나까지 세어 거둬가는 방식이 농민들의 숨을 막히게 했습니다. 결국 북한에서 이승만 정부를 '반동지주 괴뢰정권'으로부터 해방시켜주겠다고 한 말이 먹히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한국 1950 전쟁과 평화』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2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실제의 남북간의 정통성 경쟁과 인민지지 확보 경쟁은 5년이 넘었다"라고 말합니다. 지도층이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1950년 신생국 대한민국은 분명 수호해야 할 '가치'를 갖고 있었던 나라였습니다. 이것이 『해방 전후사의 인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카불, 사이공과의 차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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