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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떳떳하게 서명하실 수 있겠습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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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국제기자연맹(IFJ)은 지난 20일(현지시간) 홈페이지를 통해 더불어민주당이 추진 중인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해 “고의성에 대한 법안의 규정이 모호해 궁극적으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과잉규제의 위험이 따른다”고 비판했다. [IFJ 홈페이지 캡처]

국제기자연맹(IFJ)은 지난 20일(현지시간) 홈페이지를 통해 더불어민주당이 추진 중인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해 “고의성에 대한 법안의 규정이 모호해 궁극적으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과잉규제의 위험이 따른다”고 비판했다. [IFJ 홈페이지 캡처]

22개. '환자보호 및 부담적정보호법'의 서명에 사용된 만년필의 개수다. 일명 오바마케어법.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 직후부터 심혈을 기울인 법이다. 하원에서 겨우 일곱표 차이로 통과될 정도로 난산이었다. 2010년 3월 23일 백악관에서 열린 서명식은 축제였다. 906쪽 법안에 22개의 만년필을 바꿔가며 사인하는 데 걸린 시간은 90초. 서명이 끝나는 순간, 민주당 지도부를 포함한 300여명의 배석자는 환호했다. 1970년대부터 보건의료 개혁에 헌신하다 타계한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부인, 의료보험이 없어 엄마를 잃은 11살 아이도 있었다. 서명한 만년필은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등 법 개정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증정됐다.

결국 문 대통령 앞에 놓일 언론법 #"언론자유 희생해 퇴임 안전 도모" # 불명예스러운 의심 감수할 건가

서명식 후 펜 선물은 백악관의 전통이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1964년 흑인 투표권 등을 보장하는 시민권법 서명에 75개의 펜을 썼다. 그 펜을 받은 이 중에는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있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도 취임 첫날 행정명령에 11개의 펜을 사용했다. 대통령이 서명하는 펜에는 법령이 자랑스럽고 떳떳하다는 자부심이 묻어 있다.

본회의 처리가 며칠 미뤄졌지만, 언론중재법은 결국 문재인 대통령 앞에 놓이게 될 것이다. 백악관처럼 서명식을 한다면 펜은 누구에게 갈까. 증정 명단은 차고 넘칠 것 같다. 민주당의 윤호중 원내대표, 김용민 최고위원, 김승원 미디어혁신특위 부위원장, 박정 문체위 간사는 당연히 명단 맨 위. '알박기 선생' 김의겸 의원도 이들과 동률. 야당에서 '언론재갈법 5적'으로 꼽는 걸 봐서는 일등공신임이 분명하다. 도종환 문체위원장, 박주민 법사위원장 직무대리도 빼놓을 수 없다. 장외에서 거든 이재명·이낙연 등 여당 대선 주자들도 빠지면 섭섭할 듯. 허위·조작 보도의 '피해 호소인'들인 조국 전 법무장관, 한명숙 전 총리, 김경수 전 경남지사도 받을 자격이 있겠다. 아 참, 빼먹을 뻔했다. 이상직 의원. 여당 내에서조차 긴가민가할 때 "징벌적 손해배상제야말로 의원님들이 가짜뉴스와 싸울 수 있는 최소한의 보호 장치"라고 독전(督戰)의 북소리를 높였다.

전방위적 반대에도 여당이 기를 쓰고 언론중재법을 강행하는 이유는 미스터리다. 이들 말대로 허위·조작 보도로부터 국민의 피해 구제? 믿고 싶지만, 글쎄다. 지옥으로 가는 길이 선의로 포장될 수는 있어도, 선의로 가는 길이 이런 아수라장일 수는 없다. 아니면 대선? 송영길 당 대표는 "법 시행이 대선이 끝난 뒤 시작된다"며 부인했다. 의심쩍지만 믿어주자. 선의도 대선도 아니라면 남은 게 뭘까. 단서는 윤호중 원내대표가 이미 제공했다. "논두렁 시계 같은 가짜뉴스, 그것을 받아쓰기하던 언론의 횡포, 여기에 속절없이 당하셔야 했던 노무현 대통령."

법의 목적이 결국 퇴임 후 대통령과 측근의 안전 확보라고 의심할 근거는 개정법안 30조 2항 '허위·조작보도에 대한 특칙'에 그대로 있다. 5배 징벌적 손배를 규정한 문제의 조항이다. 여당은 논의 과정에서 고위 공직자와 대기업 및 주요 주주·임원 등은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다고 생색을 냈다. 하지만 '전직'과 가족은?

국경없는기자회가 매기는 언론자유지수는 문재인 정부 들어 개선됐다. 박근혜 정부 시절 50~70위를 오르내리다 40위권 초반으로 올라섰다. 문 대통령도 이를 자랑스러워 했다. 2019년 국경없는기자회 사무총장을 만나서는 "언론 자유야말로 민주주의의 근간이자 기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국경없는기자회가 반대 성명을 냈다. 문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하는 순간, 한국의 언론 자유 순위가 어떻게 될지는 뻔하다.

문 대통령은 검찰개혁법을 의결한 국무회의 자리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숙원이었던 권력기관 개혁의 제도화가 드디어 완성됐다"고 감개무량해 했다. 언론중재법에 서명하면서도 민주주의란 말이 나올까. 언론 자유와 퇴임 후 안전을 바꿨다는 불명예를 감수할까. 결정은 문 대통령의 몫이다.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