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

유엔에 ‘인민 10명중 9명은 장작으로 밥 짓는다’ 보고

중앙일보

입력 2021.08.27 00:32

업데이트 2021.08.27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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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정은 ‘공포 통치’에서 ‘고백 통치’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10월 10일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당창건 기념 열병식에 참석해 연설도중 “주민들에게 미안하다”며 울먹이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10월 10일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당창건 기념 열병식에 참석해 연설도중 “주민들에게 미안하다”며 울먹이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북한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문건이 하나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2030 의제 이행에 관한 자발적 국가 검토 보고서’(Voluntary National Review·VNR)라는 제목으로 북한이 지난달 1일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다.

63쪽 분량의 보고서에서 북한은 인민생활 향상과 농업·보건 등 17개 분야의 목표와 실상, 과제를 담았다. 최근 북한의 경제 실태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북한은 2019년 국내총생산(GDP)을 335억 400만 달러(약 39조2164억원)라고 밝혔다. 1조 6463억 달러 (약 1926조9942억원)로 세계 12위인 한국의 50분의 1,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사이인 세계 96위(국가통계포털 KOSIS 기준) 수준이다. 북한은 VNR에 공개한 GDP가 명목인지, 실질인지 밝히지 않았다. “모든 여성이 필요로 하는 영양이 충족됐다”는 식의 다소 모호한 표현도 여럿이다.

최근 ‘자발적 국가검토 보고서’ 제출
GDP 등 경제 실상 민낯 그대로 노출
보안에 부치던 통계, 기존 모습 탈피
국제 규범, 주민 불안 다스리려는 듯

그렇더라도 북한이 지금까지 정보 공개를 꺼려왔기에 과거 어느 때보다 구체적이고, 공식적인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식량은 2018년 495만t을 생산했다.“자연재해 등으로 최근 10년간 최저치를 기록”했지만, 2019년과 지난해 각각 665만t과 552만t 수준으로 집계했다.

에너지 분야에선 북한의 열악한 현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북한은 “에너지 현안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며 주민들의 에너지 이용실태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전기나 가스 등 청정연료를 이용하는 북한의 인구비율은 전국 평균 10.3%에 불과했다.(2017년 기준) 도시에선 취사와 난방에 석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90% 가까운 인구가 여전히 장작이나 농업부산물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전력생산량을 늘리고, 재생에너지 사용 확대, 친환경 연료와 기술 도입을 촉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보건과 관련해 아동사망률 감소 등의 성과가 있지만, 보건인력과 제약·의료기기 공장의 기술 기반, 필수 의약품 부족을 과제로 꼽았다. 식수와 위생 부문은 “진전이 더디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북한이 자신들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공개한 건 대단히 이례적이다. ‘사회주의 낙원’을 내세우고 있는 북한은 과거 낙후한 장면을 철저히 가렸다. 김일성 주석 때도, 김정일 국방위원장 때도 그랬다. 북한 관영매체들을 통해 그려지는 북한은 대부분 지도자의 업적 찬양과 장밋빛 미래였다. 그렇다보니 북한은 평양을 방문한 외부인들, 특히 한국 국적자의 경우 화려한 북한의 모습만 카메라에 담도록 했다. 귀국 전날이면 방북기간 촬영한 사진을 모두 인화해 ‘검열’한 뒤,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장면에 대해선 사진은 물론이고 필름까지 잘라내곤 했다. 2000년대 후반 평양 인근을 찾은 남측 인사가 밭에서 소 쟁기질하는 모습을 보고, 목가적인 장면이라며 촬영하자 “공화국 어디에서 소가 농사를 짓느냐. 그런거 없다”며 그 자리에서 사진 삭제를 요구했을 정도다. “좋은 장면도 많은데 남측(한국)에선 왜 사실과 다른 장면만 찍으려 하냐”는 북한 당국자의 불만 토로는 일상이었다.

북한이 지난달 1일 유엔에 제출한 ‘자발적 국가 검토 보고서’ 표지. [사진 유엔]

북한이 지난달 1일 유엔에 제출한 ‘자발적 국가 검토 보고서’ 표지. [사진 유엔]

그런 북한이 변하고 있다. 2018년 한창 남북관계가 좋을 때이긴 하지만 사진 촬영에 제약이 없었다. 이동중에 촬영을 금지하던 모습에서 “저걸 찍어야지?”라며 손을 가리킨 경우도 있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으면 “구태의연하게 그걸 묻냐”는 ‘핀잔’이 돌아왔다. 북한 매체들 역시 자연재해 현장 등 볼썽 사나운 장면들을 싣는 건 금기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지난해 김 위원장이 렉서스 SUV차량을 타고 홍수 피해 현장을 찾거나, 지방의 도로에 물난리가 난 장면을 생중계했다.

무엇보다 최근 공개석상에서 경제와 관련한 김 위원장의 언급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아버지인 김정일 위원장은 대중연설 자체를 삼갔다.

그러나 그는 기회만 있으면 마이크를 잡는다. “더이상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겠다”(2012년 4월)고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지난해 10월 “인민들에게 미안하고, 감사하다”며 울먹였다. 지난 6월 15일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에선 “인민들의 식량 형편이 긴장해지고 있다”며 식량난을 언급했다. 앞서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엔 “수령을 신비화하지 말라”(2019년 3월)고도 했다. “수령의 결정에는 오류가 없으니 무조건 따라야 한다”며 선대(先代) 지도자들이 만들어 놓은 논리(유일사상)의 수정이자, 일종의 고백에 가깝다.

유엔은 VNR을 제출하지 않을 경우, 추후 경제·기술적인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해 보고서 제출에 강제성을 뒀다고 한다. 북한이 유엔의 지원을 염두에 두고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추정이 가능한 대목이다. 그러나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겠다”는 북한의 입장을 고려하면 VNR은 최근 김 위원장의 ‘고백통치’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화려한 면만 부각하는 경직성에서 벗어나 외부를 의식하는 결과라는 얘기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등 국제기구의 본부가 다수 있는 스위스에서 유학한 김 위원장은 국제사회와 교류 없이 경제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주변 사회주의 국가들이 이미 오래전 체제전환을 한만큼 국제기준을 무시하고는 한 걸음도 나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김 위원장이 집권 직후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고 지시했던 게 이를 대변한다.

김 위원장이 ‘단번 도약’을 내걸며 야심차게 출발했지만, 북한 경제의 어려운 처지는 새삼스런 뉴스가 아니다. 또  2019년 2월 주민들의 대대적인 환송을 받으며 떠난 2차 북미 정상회담도 빈손귀국이었다. 2018년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조성한 통일의 기운도 냉각기다. 경제에서도, 외교에서도, 남북관계에서도 녹록지 못한 현실인 셈이다.

북한은 수령을 신(神)처럼 여기는 신정(神政)체제다. 좋지 못한 결과를 지도자의 탓으로 돌리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김 위원장의 ‘고백’은 오히려 북한 주민들이나 당국자들이 스스로를 질책하는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최근 다이어트에 나선 김 위원장의 모습을 보며 주민들이 가슴 아프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김 위원장의 고백통치가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것인지,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억압과 결속만 강조하던 이전의 모습에서 탈피해 국제사회의 규범을 의식하고, 주민 불만을 다스리는 수단이 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북, 한미훈련 마지막날 “정기국회 소집”
북한이 다음 달 28일 정기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14기 5차)를 소집했다고 북한 매체들이 26일 밝혔다. 조선중앙통신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16차 전원회의가 24일 만수대의사당에서 진행됐다”며 이같이 전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는 최고인민회의 휴회중의 최고 주권기관이다.

통신에 따르면 북한은 다음달 최고인민회의에서 시·군 발전법, 청년교양보장법 채택 및 인민경제계획법 수정보충(개정), 조직(인사)문제를 다루기로 했다. 북한은 1년에 1~2차례 최고인민회의를 열어 법안 및 장관급 인사를 예고 했다.

눈길을 끄는 건 북한이 청년교양보장법을 채택키로 했다는 점이다. 북한은 지난해 말 동영상이나 음악등 서방 문화를 접했을 경우 처벌하는 ‘반동사상 문화 배격법’을 제정했다. 체제 이완을 막기 위한 것이다. 최근에도 사상과 일심단결을 강조하고 있다. 청년교양보장법에 어떤 내용이 포함될지 주목된다.

또 코로나19로 국경을 봉쇄하며 경제난을 겪고 있는 북한이 경제관련법을 수정키로 한 것 역시 관전 포인트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은 지난 1월 8차 당 대회를 열어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에 방점을 둔 5개년 경제계획을 확정했다”며 “올해 진행된 경제계획 집행 실태를 점검하고, 더욱 조이기 위해 법적 장치를 마련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시·군 발전법 및 재자원화법 집행 검열 감독 실태에 관한 문제를 논의키로 한 것도 경제난 속에서 자력갱생에 의한 지역 발전과 국가계획 수행 전반에 대한 문제점을 보완하고 대책을 강구하려는 의도일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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