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새벽까지’ 작곡가와 연주자의 동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작곡과 교수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작곡과 교수

세종솔로이스츠가 개최하는 음악 페스티벌 ‘힉엣눙크’(HIC ET NUNC, 여기 그리고 지금·사진)의 8월 22일 스티븐 김 바이올린 독주회에서 작곡가 이신우의 ‘새벽까지(Till Dawn)’가 세계 초연됐다.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신진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로 한국 현대음악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중견 작곡가의 신작을 감상할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다섯 악장으로 구성된 ‘바이올린 소나타 제2번 Till Dawn’은 이날 초연을 맡은 스티븐 김에게 헌정됐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작곡가와 연주자의 긴밀한 협업을 보여준 점이다.

오선보에 빼곡하게 기록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온전히 실현해주는 연주자를 만난다는 것은 작곡가에겐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베토벤·쇼팽·리스트가 했던 것처럼 자신의 곡을 스스로 초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작곡가는 자신의 작품을 청중에게 전달해주는 연주자에게 상당히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예술

예술

연주자는 작품을 소리로 세상에 내놓는 것을 넘어, 창작에 영감을 주고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래서 작곡가는 감사의 마음으로 자신의 곡을 연주자에게 헌정한 예도 많다. 브람스는 그의 절친 바이올리니스트 요하임과 교감하며 바이올린 작품을 창작해 헌정했고, 쇼팽은 각별한 우정을 맺었던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리스트에게 ‘연습곡 op.10’을 헌정했으며, 이탈리아 현대 작곡가 베리오는 성악가인 자신의 아내 캐시 버버리언의 역량에 힘입어 실험적인 성악곡을 발표하여 음악사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창작과 연주 준비 과정에서 연주자와 많은 소통을 하며 완성된 ‘새벽까지’는 이신우의 새로운 음악 세계를 선보이는 작품이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 음색의 폭넓은 스펙트럼이 치밀하게 활용되면서, 사운드의 대조와 음향의 잔향이 나타나는 이 소나타는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두 악기는 동일한 모티브를 공유하며 음악적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유니즌으로 완전히 화합하였다. 조성과 무조성을 오가며 비루투오소적 테크닉과 침묵의 대조가 나타나는 대서사의 마지막은 친숙한 조성적 선율로 마무리됐다. 새벽, 동이 트기까지의 갈등이 평안하게 해결되는 느낌을 주었다.

이 방대한 곡을 스티브 김은 완전히 몰입하여 거의 암보로 연주하였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음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음향의 덩어리를 강렬하게 표출하였다. 긴 시간 작곡가와의 소통을 통해 작품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작곡가가 구축한 진지하고 치밀한 세계가 연주자에 의해 완벽하게 재현되는 이런 공연이 앞으로도 많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