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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 찰나의 승부, 가을 전어가 돌아왔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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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전어철 맞은 서천 홍원항

가을 전어는 기름기가 풍부해 씹을수록 깊고 고소한 맛을 낸다. 주로 회·무침·구이로 먹는다. 충남 서천 홍원항에 전어를 다루는 식당이 몰려 있다.

가을 전어는 기름기가 풍부해 씹을수록 깊고 고소한 맛을 낸다. 주로 회·무침·구이로 먹는다. 충남 서천 홍원항에 전어를 다루는 식당이 몰려 있다.

오감이 먼저 반응하는 먹거리가 있다. 가을 전어가 그렇다. 기름기 잔뜩 머금은 전어가 석쇠 위에서 타드는 소리와 향, 은백색의 탐스러운 뱃살, 뼈째 잘근잘근 씹어 먹는 식감만 떠올려도 그만 침이 꼴깍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전어로 이름난 항구는 향부터 다르다. 충남 서천 홍원항은 지금 비릿한 갯내보다 고소한 전어 향이 더 진하다. 전어의 계절이 돌아온 게다.

1분 안에 끝나는 전어떼와 대결

전어를 쫓는 어부는 시간을 가리지 않는다. 물때가 맞으면 새벽에도 출항을 쉬지 않는다.

전어를 쫓는 어부는 시간을 가리지 않는다. 물때가 맞으면 새벽에도 출항을 쉬지 않는다.

‘전어’가 ‘가을’과 한 몸처럼 붙어 다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산란을 마친 전어가 부지런히 먹이활동을 하고 연안으로 올라오는 때가 가을이다. 9~10월 살과 지방이 차오른다. 이름난 황금 어장이 바로 서천 앞바다다. 이맘때 서천 홍원항에 들면 갈매기 떼 몰고 다니는 전어 배를 쉬이 볼 수 있다.

전어잡이는 녹록지 않다. 15년 경력의 이일희(61) 선장은 “숨 막히는 시간 싸움이다. 때를 놓치면 빈 배로 돌아와야 한다”고 증언했다. 하루 두 번,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며 물살이 잦아드는 약 두 시간만 전어 떼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 찰나를 노려 홍원항과 인근 마량항에서 전어 배 약 20척이 뜬다. 만선을 꿈꾸며 시속 70㎞까지 속도를 올린다. 배에는 길이 300m 폭 12m의 대형 선망(旋網)이 실린다. 어군 탐지를 마친 선장이 ‘투망!’ 신호를 보내면, 선원 예닐곱 명이 일제히 달라붙어 그물을 던진다. 동시에 배는 크게 회전하며 전어 떼를 가둔다. 1분 안에 승부가 난다.

전어를 부두로 옮기는 건 뒷배(운반선)의 몫이다. 전어는 성미가 급해 뭍으로 나오면 금세 죽고 만다. 활어 상태로 나가야 제값을 받기 때문에, 뒷배가 부두에 닿는 즉시 무게를 달아 전국으로 실려 간다. 1톤에 400만원 선. 9월 한창때는 한 번에 최대 10톤이 잡힌단다. 한탕 크게 잡는 날도 있지만, 허탕 치는 날이 부지기수다. 이 전쟁 같은 풍경이 10월까지 이어진다.

씹을수록 진가 드러내는 맛

한 번에 많게는 10t 가까운 전어를 잡아들인다. 활어 상태로 신속히 옮겨야 제값을 받을 수 있다.

한 번에 많게는 10t 가까운 전어를 잡아들인다. 활어 상태로 신속히 옮겨야 제값을 받을 수 있다.

부두 앞의 치열한 생존 경쟁과 달리 주변 식당가는 다른 세상처럼 조용하다. 코로나 여파로 관광객이 크게 줄어서다. 20년을 이어온 전어 축제도 2년째 열지 못했다. 300석 규모의 횟집 ‘해마루’도 요즘은 빈자리가 더 많다. 조미정(52) 사장은 “2년 전까지는 손님이 바글바글했다. 태안 기름 유출 때도 이보다 힘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싱싱한 활어를 맛보려면 결국 항구로 가야 한다. 이른바 ‘로켓 배송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다. 홍원항 앞에 전어를 다루는 식당이 10여 집 줄지어 있다. 수조마다 15~20㎝ 남짓한 자연산 전어가 꽉꽉 들어차 있다.

회·무침·구이를 한 상에 올리는 일명 ‘전어 세트(약 8만원)’가 어느 식당에서나 인기 메뉴로 통한다. 항구까지 왔으니 두루 맛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동네 터줏대감으로 통하는 ‘서해바다로’의 주방을 엿봤다. 한 요리마다 보통 10마리(1㎏) 남짓한 전어가 올라가는데 일일이 등뼈를 발라내고, 얇고 길게 포를 떴다. 이상원(64) 사장은 “손은 많이 가지만, 전어의 고소하고 싱싱한 식감을 느끼기 가장 좋은 방식”이라고 했다.

가을 전어는 체면을 내려놓고 먹어야 더 맛있다. 얇게 저민 전어회는 젓가락에 걸리는 대로 네댓 점씩 집어 된장 양념에 찍어 먹는다. 잔가시가 많아 씹을수록 되레 쫄깃하고 담백하다. 전어구이도 등뼈만 발라내고 잔가시 그대로 씹어 넘긴다. 잔가시 걷어내며 깨작거려서는 진가를 알 수 없다. 고수는 대가리와 내장까지 입에 넣지만, 필수는 아니다. 가을 전어를 씹고 뜯고 맛봤다. 식사가 끝나자 입가가 기름기로 반지르르했다. 가을 냄새가 온몸에 밴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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