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롯데칠성의 수제맥주 오디션, 상생 메시지?명분쌓기?

중앙일보

입력 2021.08.26 15:00

[더,오래] 황지혜의 방구석 맥주여행(70)

캔 맥주로 편의점에 들어가지 못한 수제 맥주 양조장은 코로나 19 상황으로 사지에 몰리고 있다. 어떻게든 버티는 자가 이기는 시간이 온 것이다. [사진 황지혜 제공]

캔 맥주로 편의점에 들어가지 못한 수제 맥주 양조장은 코로나 19 상황으로 사지에 몰리고 있다. 어떻게든 버티는 자가 이기는 시간이 온 것이다. [사진 황지혜 제공]

“수제맥주 양조장이 기존에 팔던 맥주를 출품하면 온라인 대국민 투표와 전문가·소비자의 시음 평가회를 거쳐 최종 우승 맥주를 발표한다. 총 7000만원의 상금이 걸려 있으며 Top10 안에 든 수제맥주에 대해서는 캔 제품 생산부터 유통채널 입점까지 모든 과정을 인큐베이팅 해준다.”

롯데칠성음료는 최근 이런 내용을 알렸다. ‘2021 대국민 수제 맥주 발굴 오디션-수제맥주캔이 되다’라는 이름의 행사다. 공고를 보자마자 흔한 TV 속 장면이 떠올랐다. 아이돌로 데뷔하기 위해 오디션에 참가한 연습생, 밴드나 트로트 가수로 세상에 알려지기 위해 오디션 무대에 나선 무명 가수들. 간절한 눈빛과 꼭 맞잡은 손, 떨리는 목소리. 심사위원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오고 가고 결국 심사위원의 선택으로 운명이 결정지어진다.

롯데칠성음료의 수제 맥주 발굴 오디션 포스터. [사진 롯데칠성음료]

롯데칠성음료의 수제 맥주 발굴 오디션 포스터. [사진 롯데칠성음료]

이어 느껴진 감정은 모욕감이다. 작은 양조장에서 열정을 담아 정성 들여 만든 수제 맥주를 평가하고 줄을 세워 생존할 맥주를 결정한다? “너희 상황 지금 최악이잖아. 빨리 와서 나한테 예쁘게 보여야 요즘 없어서 못 파는 편의점 캔맥주가 되지.” 오디션 주최자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 오만하다, 건방지다. 독립성, 장인정신, 품질에 대한 고집 등 수제 맥주의 정신이 조롱당한 기분이다. 래퍼들이 오디션에서 읊조리던 대목이 생각났다. ‘네가 뭔데 나를 평가해?’ 심사 과정 역시 코웃음이 나온다. 온라인 대국민 투표는 또 무엇인지. 맛은 알 것 없고 그저 취향에 맞는 캔 디자인을 고르라는 것인가?

대기업이 경쟁력 있는 수제 맥주를 발굴해 생산해주고 팔아준다? 언뜻 보면 코로나 19 바이러스 유행으로 최악의 상황에 몰리고 있는 대다수 수제 맥주 양조장을 향한 상생의 메시지 같다. 하지만 현재 맥주 업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챌 수 있다. OEM으로 재미를 본 롯데칠성이 새로운 OEM 대상을 찾는 척하면서 명분 쌓기를 하는 것임을.

롯데칠성은 올해 들어 곰표맥주, 제주 맥주 등을 OEM 생산하면서 공장 가동률을 크게 높였다. 당국은 올 1월부터 맥주 업계에 OEM을 허용해줬고 이를 통해 제대로 수혜를 본 기업은 롯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OEM으로 기업가치가 높아질 것이라는 증권사 리포트, 언론 기사들이 쏟아졌다. 한 증권사 리포트에 따르면 맥주 OEM은 롯데칠성음료의 공장 가동률을 20%에서 40%로 2배 이상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해 10월 8만 원대였던 롯데칠성의 주가는 현재 13만~14만 원대다.

롯데칠성은 고작 3개 대기업이 과점하고 있는 맥주 시장에서 한 자릿수 점유율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OEM이라는 돌파구를 마련했고 이 기세를 이어가고자 한다. 하지만 롯데칠성 입장에서 150여개 중소기업이 있는 연 1000억 원밖에 되지 않는 수제 맥주 시장을 침범한다는 지적은 받고 싶지 않다. 대신 수제 맥주 양조장을 돕는다는 명분을 찾고 싶은 것이다. 이번 오디션은 이런 의도에 들어맞는 이벤트다.

실질적으로는 롯데칠성이 OEM 할 맥주를 찾기 위해 이런 비용과 에너지를 쏟아부을 필요는 없다. 국내 수제 맥주 업계는 너무 빤하기 때문이다. 롯데칠성이 절대 모를 리 없다. 어느 양조장이 맥주를 잘 만들고, 어느 양조장에 OEM 생산 니즈가 있고, 어떤 대표가 협조적인지 알고 있다. 그런 양조장과 만나서 OEM 논의를 하면 간단하다.

이제 ‘대기업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맥주가 수제 맥주인가’라는 질문은 사치로 느껴진다. 이미 수제 맥주는 테라·카스 외의 맥주라는 의미로 변질해 버렸다. 사실 대놓고 수제 맥주라며 맥주를 출시하고 있는 오비맥주보다는 상생 흉내라도 내는 롯데칠성이 낫다고 볼 수도 있다.

캔 맥주로 편의점에 들어가지 못한 수제 맥주 양조장들은 현재 영업제한 등으로 사지에 몰렸다. 롯데칠성과의 협력을 모색하려는 양조장을 응원한다. 어떻게든 버티는 자가 이기는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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