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발레 ‘별’이 된 한국인…‘독재자’ 감독 고집 꺾은 비결

중앙일보

입력 2021.08.26 05:00

업데이트 2021.08.26 11:28

박세은 파리오페라 발레단 수석 무용수. 최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박세은 파리오페라 발레단 수석 무용수. 최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한 달 뒤, 프랑스 발레의 역사를 한국인 발레리나가 새로 쓴다. 다음달 24일(현지시간) 개막하는 파리오페라발레단의 갈라 공연에서다. 주인공은 지난 6월 이 발레단 최고 등급인 에투알(l'étoile)로 승급한 박세은 씨. 한국인뿐 아니라 아시아인으로 이 발레단 에투알 자리에 오른 최초의 무용수다. 다음달 갈라 공연은 에투알로서의 그의 첫 무대다. 여름 휴가차 서울을 찾은 그는 최근 중앙일보와 만나 “에투알의 꿈을 이룸으로써 내 춤을 마음껏 출 수 있게 된 점이 기쁘다”며 “무대에 빨리 서고 싶다”고 눈을 반짝였다.

사복 차림도 발레 무용수의 태는 숨길 수 없다. 인상적인 건 그의 발. 사진 촬영 차 포앵트 슈즈(토슈즈)로 갈아신는 그의 발목과 발등이 그의 얼굴만했다. 그만큼 얼굴이 작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발레 무용수의 생명인 발을 탄탄히 단련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연습에 연습을 더하며 쌓은 노력이 빚어낸 결과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오렐리 뒤퐁 단장이 그를 승급시킨 직후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세은은 항상 열심이다(travailleuse)”라고 극찬한 이유를, 그의 발은 말해줬다.

박세은 파리오페라 발레단 수석 무용수. 서울 양천구 현대백화점목동점 글라스하우스에서 방역 수칙을 지켜 촬영했다. 김성룡 기자

박세은 파리오페라 발레단 수석 무용수. 서울 양천구 현대백화점목동점 글라스하우스에서 방역 수칙을 지켜 촬영했다. 김성룡 기자

파리오페라발레단이 발행하는 매거진 옥타브(Octave)에서 추출한 영상. '빈사의 백조'를 리허설 중인 박세은 무용수. 중앙일보 홈페이지 또는 앱에서 전체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Copyright Paris Opera Ballet

파리오페라발레단이 발행하는 매거진 옥타브(Octave)에서 추출한 영상. '빈사의 백조'를 리허설 중인 박세은 무용수. 중앙일보 홈페이지 또는 앱에서 전체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Copyright Paris Opera Ballet

파리오페라발레단은 콧대 높기로 유명하다. ‘태양왕’ 루이14세가 1661년 설립한 왕실 발레학교를 전신으로 한 이 곳은 건물 자체가 파리 도심에 자리잡고 있는 랜드마크이자 문화유산이다. 프랑스어로 ‘별’을 뜻하는 에투알 자리도 호락호락 허락하지 않는다. 다음달 갈라 공연의 백미는 데필레(défilé)인데, 발레단 소속의 가장 막내인 어린 연습생들부터 에투알까지 등급 순서에 따라 입장하는 행진 무대다. 모두가 가장 기본인 흰 색 의상을 입고 관객을 마주하는데, 에투알에게만 반짝이는 보석 티아라(왕관)가 허락된다. 그는 데필레와 관련해 “에투알로 활동을 공식 시작한다는 의미라서 기대가 크다”고 전했다.

데필레 자체는 세계 유수 발레단들이 많이들 무대에 올리지만 파리오페라발레단이 유독 잘 활용한다. 발레 입문부터 발레단 입성까지 대개 단일화된 코스를 밟는 파리오페라발레의 특성을 잘 대변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이곳에 서울예고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박세은이 에투알로 선다는 것은 세계 발레계에서 큰 뉴스다.

파리오페라발레단 공식 홈페이지에 새로 올라온 박세은 씨의 에투알 프로필. [발레단 홈페이지 캡처]

파리오페라발레단 공식 홈페이지에 새로 올라온 박세은 씨의 에투알 프로필. [발레단 홈페이지 캡처]

그는 일찌감치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이 입상했던 로잔 발레콩쿠르뿐 아니라 미국 잭슨콩쿠르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선보이며 입상했다. 그러다 2011년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문을 두드렸다. 한국에서 배운 러시아식 바가노바 스타일과 프랑스 스타일은 달랐지만 그는 새 도전을 택했다.

주역만 맡다가 군무로 다시 시작했죠.  
“군무가 훨씬 어려웠어요. 주역이면 내 동작의 완성도만 높이면 되는데, 군무는 옆의 동료와 줄도 잘 맞춰야 하고 분위기를 살펴가며 무대에 서야하니 센스도 키울 수 있었고요, 위기 대처 순발력도 길러졌어요. 주역으로 무대에 서는 무용수들을 보면서 그들의 멘탈이나 긍지를 체감했고, 나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겠다고 절감했어요. 처음부터 주역하라고 했으면 못했을 거 같아요. 매일 기본 바워크 연습 시간에도 긴장감이 가득했고요. 이런 모든 점들이 저를 더 성장하게 해줬다고 생각합니다.”  
승급이 예상보다 조금 늦어서 팬들이 많이 안타까워했어요.  
“사실, 아이를 낳고 돌아올까도 생각했어요. 여자로서의 삶도 소중하니까요. 그런데 남편이 ‘아냐 너는 할 수 있어, 기다려봐’라고 하는 거에요. 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잖아요. 희망을 갖고 계속 기다렸죠.”  
부상도 크게 당했었죠.
“2015년에 연습을 하던 중 다른 무용수의 발에 맞아서 이마가 6cm 찢어지면서 피가 콸콸 쏟아졌어요. 의사는 땀도 흘리지 말라고 했어요. 암흑의 시기였죠. 하지만 2주 쉬면서 깨달았어요. 결국 중요한 건 춤을 추는 거라는 거요. 마음을 딱 접고 불살랐죠. 이겨내지더라고요.”  
유수의 발레 세계 콩쿠르인 미국 잭슨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던 당시의 박세은. 서울예고 2학년이었다. 발레 동작 파세(passé)의 정석. 연합뉴스

유수의 발레 세계 콩쿠르인 미국 잭슨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던 당시의 박세은. 서울예고 2학년이었다. 발레 동작 파세(passé)의 정석. 연합뉴스

다른 곡절도 많았다. 벵자맹 밀피예 예술감독과의 일화도 빼놓을 수 없다. 순혈주의 논란을 돌파하기 위해 파리오페라발레단이 영입한 미국계 발레 무용수다. 영화 ‘블랙 스완’에 나탈리 포트만 상대 무용수로 출연했다가 실제 부부의 연을 맺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발레단 감독으로서의 밀피예는 독재자에 가까웠다. 자신의 스타일만을 고집하면서 발레단의 많은 무용수들이 무대에 설 기회를 잃었고, 박세은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다 그는 밀피예 감독에게 직접 면담을 신청하기로 결심한다.

“최선을 다하는데도 안 되니 2년 정도 지나자 인내심의 한계가 왔어요. 제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이잖아요. 저도 처음엔 내성적 성격 때문에 기다리기만 했어요. 그런데 어떤 동료들이 단장에게 자기 의견을 편히 얘기하길래 신기하다고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그렇게 말하는 것도 능력이야’라고 하더라고요. 강펀치를 맞은 거 같았어요. 저는 춤만 열심히 추면 기회가 자연스레 올 거라 믿고 있었거든요. 그 믿음이 틀렸던 거죠. 바로 면담을 신청했어요. 나도 클래식 발레 무대에 서고 싶은 데 왜 안 들어가느냐, 내가 뭘 바꿨으면 좋겠느냐 등을 물었죠.”

면담 뒤, 박세은 무용수는 다시 기용됐다.

중앙일보와 인터뷰 중인 박세은 파리오페라 발레단 수석 무용수. 김성룡 기자

중앙일보와 인터뷰 중인 박세은 파리오페라 발레단 수석 무용수. 김성룡 기자

부침도, 부상도 겪었지만 그의 발레 인생은 또다른 시작을 맞이한다. 파리오페라발레단 에투알로서의 그의 무대는 이제 막 그 막을 올렸다.

그에게 에투알이 되어 특히 좋은 건 뭐냐는 우문을 던졌더니, 이런 현답을 내놨다.

“자유로움이요. 프랑스 발레도 마스터했다는 인정을 받은 셈이니까요. 이제 저도 더 이상 저를 증명할 필요없이, 제 춤을 출 수 있는 그 자유가 감사해요. 무대에 설 때가 정말 최고거든요. 한국 관객분들과도 어서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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