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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부르카를 써 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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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부르카를 쓴 모습. [중앙포토]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부르카를 쓴 모습. [중앙포토]

부르카를 써 본 적이 있다. 머리만 감추는 것이 아니라 전신을 에워싸는 것이니 입어 본 적이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듯싶다. 아프가니스탄 내전 취재 때 이방인 티를 덜 내야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에 현지인들이 많이 쓰는 모자(‘파쿨’이라 불리는 아랫단을 둘둘 말아 쓰는 형태로 탈레반이 쓰는 것과는 다르다)를 사려고 시장에 갔을 때다. 가게에 부르카가 줄줄이 걸려 있기에 ‘체험’ 삼아 입어 봤다. ‘눈 있는 곳에 뚫려 있는 저 작은 망사 창을 통해 바깥세상을 충분히 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어 온 터였다.

집 안에만 있으라는 강제 느껴져 #기자에 강요되는 '언론 부르카법' #가급적 말랑말랑한 글 쓰라는 것 #

입기 전에 한 번 놀랐다. 가게 주인이 어떤 부르카를 원하느냐고 물어봤다. 가장 싼 것은 우리 돈으로 2000원쯤 했고, 비싼 것은 그것의 열 배 가격이었다. 그 중간에 여러 종류가 있었다. 천의 재질이 다르다고 했다. 기능적으로나 디자인상으로는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현지 통역인이 “우리는 딱 보면 고급인지 아닌지 안다”고 말했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 즉 타인보다 더 좋은 것을 입고 싶어 하는 욕망의 강인함을 확인했다.

짐작했던 것보다는 세상이 잘 보였다. 문제는 시야가 아니었다. 우선 숨쉬기가 답답했다. 코앞에 바로 천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늦가을이었는데 더운 여름에는 내뿜는 숨의 열기를 참기 어려울 것 같았다. 가장 큰 문제는 손을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천이 휘감겼다. 옷이 행동을 옥좼다. ‘가급적 집에서 나오지 말라는 거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르카라는 하나의 도구가 사람의 의식과 행동을 어떻게 제약하는지, 입어 보니 다소 감이 왔다.

머지않아 이 땅의 언론인들은 부르카를 입어야 한다.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라는 장막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 뭔가를 쓸 때마다 ‘이것은 끝내 분명한 사실로 입증될 수 있는 것인가’라고 스스로 물어야 한다. 잠정적 사실이나 논쟁적 사실은 피해야 한다.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은 ‘가급적 쓰지 말라’는 것이다.

이 ‘언론 부르카법’을 만든 이들은 “사실만 쓰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여자를 집에 가둔 것은 아니다”는 탈레반과 비슷하다. 기자 출신까지 그런다. ‘사실’은 명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대법원 판결 정도는 돼야 우리 사회에서 공적인 사실로 인정받는다. 최근에는 그마저도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명숙 전 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도 확정된 사실에서 논쟁적 사실로 변해 가고 있다. 녹음 파일이나 동영상을 확보하면 사실에 대한 시비를 피할 수 있을까. 당사자는 그것은 특정 부분에 불과하고 전체 맥락이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다.

조국 전 장관 가족 비리,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윤미향 의원 비리는 처음 언론이 보도할 때 당사자와 관련 기관이 ‘허위 사실’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나지 않았으니 확정적 사실은 아니라고 그들은 지금도 말한다. 언론 부르카법 취지에 따르면 언론이 보도하지 않았어야 했다. 요즘 조금씩 사실의 편린이 드러나는 이스타항공 관련 의혹, 태양광 사업 의혹도 수사기관이 수사하고 법원의 최종 판결이 날 때까지 언론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 관련자 중 상당수가 민간인이기에 새 법의 적용을 받는다.

기자들도 어떻게 사는 게 편한지 다 안다. 투사의 심정으로 굽히지 않을 이도 있겠지만, 회사가 치르게 될지 모르는 막대한 배상금, 길고 복잡한 송사를 생각하면 손이 움츠러들게 마련이다. 결국 이 온라인 시대에 노동력 ‘가성비’가 뛰어난, 즉 읽으면 재미있지만 몰라도 그만인 뉴스, 아무도 시비 걸지 않을 말랑말랑한 뉴스가 보도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커질 게 자명하다. ‘언론 부르카’를 강제하는 사람이나 입는 사람 모두 그게 지극히 비정상이라는 것에 점차 둔감해지는 세상, 비리 폭로 등의 시끄러운 일이 신문과 방송에 좀처럼 나오지 않는 평온한 시대가 곧 우리에게 온다.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