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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아빠 페미니스트’가 본 ‘안산 숏컷’ 논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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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혜준 사단법인 ‘함께하는아버지들’ 대표

김혜준 사단법인 ‘함께하는아버지들’ 대표

서울 마포에 살던 시절 필자는 안산(鞍山)을 즐겨 오르곤 했다. 집에서 가깝고 그리 높지 않아 만만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딸과의 추억이 있어서 더 친숙한 산이다. 안산 정상에 도달하려면 마지막 20분 정도는 바위를 타야 한다. 딸은 초등학생 시절 필자의 과장된 감탄사에 한껏 탄력을 받아 들창코를 발름거리면서 이 구간을 곧잘 오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어떤 등산객으로부터 부엉이 소리 내는 법을 배웠다. 그날 이후 필자는 퇴근할 때마다 현관문 앞에서 초인종 대신 부엉이 소리를 냈고, 그럴 때마다 딸은 부엉이 소리를 따라 내며 아빠를 반겼다. ‘새끼 부엉이’를 키우는 ‘아빠 부엉이’의 행복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컸다.

자유·선택 옥죄는 젠더 편견 엄존
아버지가 되니 딸의 현실 잘 보여

이제 딸은 아빠의 감탄사 따위엔 콧방귀도 뀌지 않는 취준생이 됐다. 딸의 성인 등산화는 바깥 공기 한번 쐬어보지 못한 채 신발장 속에서 코로나19 4단계의 고통을 겪고 있다. 그래서인지 안산과 부엉이의 추억도 ‘내 마음속 보석상자’ 속에만 봉인돼 있었다. 그러다 이번 도쿄 올림픽에서 양궁 3관왕의 쾌거를 거둔 안산(安山·20·여) 선수를 통해 마침내 봉인이 풀렸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안 선수의 숏컷(short cut) 헤어스타일을 놓고 느닷없이 페미니즘 논란이 불거졌다. 일각에서는 “이슈화를 노린 과격 페미니스트들의 조작극”이라는 의구심까지 제기되는 모양이다. 악의적으로 젠더(gender) 프레임을 만들어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취업 면접에서 혹여 페미니스트로 오해받을까 봐 폭염에도 숏컷을 안 하겠다던 딸을 지켜봤던 필자는 이번 사건을 통해 한국사회에 실존하는 젠더 편견이 제대로 드러났다고 본다.

실제 대기업에서 임원으로 일하는 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딸의 염려는 결코 과장이 아닌 것 같다. 큰 조직 관리자들이 젠더 갈등을 선제적으로 피하고 싶어서 페미니스트 끼가 있어 보이는 지원자를 가능하면 피하려 한다는 말도 들린다. 이런 기피 심리가 존재하는 이상, 그것이 숏컷이 됐든 일시적으로 남혐을 표현했던 ‘오조오억’이나 ‘웅앵웅’이라는 단어가 됐든, 식별을 위한 가늠자가 필요할 테다. 그러니 문제의 본질은 사회적 편견이 엄존한다는 것과 그로 인해 우리의 딸들이 자유와 선택을 제약받고 있다는 것이지 그러한 편견을 왜 그렇게 저급하게 드러내느냐가 아니다.

필자도 한때 성인지 감수성이 낮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딸의 아빠가 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바뀌었다. 딸이 그저 ‘착하고 예쁜 공주’로 자라나는 걸 원하지도 않았고, 백만장자가 자기 눈에 드는 남자에게 전 재산과 딸을 주겠다는 식의 동화가 못마땅한 사람으로 변했다. ‘딸바보’와는 차원이 다른, 요즘 유행하는 말로 ‘빠미니스트’(아빠+페미니스트)가 된 것이다.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격정·증오·비타협·투사의 이미지들이 어른거린다. 그렇다면 빠미니스트는 어떤가. 필자 자신을 뒤돌아볼 때 각성·염려·사랑·실천 등의 단어들이 떠오른다. 빠미니즘(아빠+페미니즘)은 본질적으로 부성애(父性愛)의 확장이며, 부성이 확장될 때 그 사회 지성(知性)의 수준은 한층 높아진다. 딸의 미래를 염려하는 부성이 작동한다면 아프가니스탄처럼 야만과 신음이 판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날이 설대로 선 여혐과 남혐에 포위돼 그 누구라도 여차하면 베일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분열과 대립을 넘어서려면 빠미니스트의 문제의식과 실천이 필요하다. 올림픽은 끝났고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진영·지역·세대·남녀로 갈라진 대한민국을 통합할 기회다. 딸을 둔 아버지의 마음으로 젠더 갈등을 극복해낼 통합의 리더십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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