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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시동 걸린 프란치스코 교황 방북… 기대 반 우려 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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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교황 북한 방문, 과연 성사될까

2020년 6월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한 교황청대사 알프레드 슈에레브 대주교로부터 한반도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반도 상황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PA]

2020년 6월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한 교황청대사 알프레드 슈에레브 대주교로부터 한반도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반도 상황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PA]

북·미는 물론 남북관계마저 얼어붙은 가운데 교황 방북설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과 함께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북을 징검다리 삼아 남북 정상회담까지 성사시켜 힘 빠진 남북관계에 활기를 불어넣겠다는 것이다. 전 세계 천주교의 수장이자 평화와 자비의 상징인 그가 공산 독재국가를 방문하면 그 의미가 각별할 수밖에 없다. 잘만 하면 북한의 인권 탄압을 누그러뜨리고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다. 하지만 자칫하면 별 소득 없이 김정은 정권에 놀아나게 된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교황의 방북 추진 현황과 이를 둘러싼 논란 등을 짚어본다.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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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평화 정착을 위한 열정
2014년 12월 역사적인 미국과 쿠바 간 국교 정상화가 이뤄지지 세계 언론들은 이를 성사시킨 막후의 인물을 크게 보도했다.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이었다. 2013년 3월 즉위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여러모로 특별하다. 교황의 북한 방문 문제도 그의 독특한 성격이 크게 작용한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그는 남·북미에서 처음으로 배출한 교황이다. 그의 조국은 기나긴 군사독재에다 심각한 빈부 격차에 시달려왔기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일찍이 진보적이고 반제국주의적 성격의 '해방신학'에 심취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2014년 한국 방문 후 귀국 길에 엘살바도르에서 해방신학을 전파하다 살해당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2015년 9월 쿠바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나라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인 홀귄의 혁명광장에서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AP]

2015년 9월 쿠바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나라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인 홀귄의 혁명광장에서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AP]

 이런 사상을 지닌 터라 그는 억눌린 이들의 해방에 적극적이다. 미-쿠바 관계 개선 후 그는 2015년 9월 미국 방문 길에 쿠바에 직접 들러 양국 화해를 축복해주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관계 개선을 촉구하며 2015년 교황청과 팔레스타인 간의 공식 외교 관계를 맺기도 했었다. 따라서 북한 방문 역시 전 세계적 평화 정착을 위해 그가 쏟는 열정의 일환인 셈이다.
 하지만 제3세계와 공산국가에 대한 그의 수용적 태도는 때로 비판을 낳았다. 중국에 대한 유화정책이 대표적이다. 교황은 2018년 모든 주교는 교황청에서 임명한다는 원칙을 버리고 중국만 예외적으로 이 나라 정부에 임명권을 주기로 합의한다. 이른바 중국 정부가 고수해온 '자선자성(自選自聖)' 정책을 수용한 셈이다. 대신 중국은 교황을 천주교 수장으로 인정했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지 교황이 중국에 굴복했다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행동하는 교황, 북한행 강력 희망 #쌀·백신 들고 방문할 가능성 있어 #내년 남북 정상회담 도움될 수도 #북 인권개선 및 비핵화 제기해야 #북에 말려들면 안 가느니만 못해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와 유흥식 대주교가 김대건 신부의 생가로 함께 걸어가고 있다. 유 대주교는 지난 6월 40만명의 천주교 사제 등을 관리하는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으로 임명됐다. [AP]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와 유흥식 대주교가 김대건 신부의 생가로 함께 걸어가고 있다. 유 대주교는 지난 6월 40만명의 천주교 사제 등을 관리하는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으로 임명됐다. [AP]

유흥식 대주교 교황청 장관 임명
 교황의 방북이 추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최초로 본격 논의된 것은 2000년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김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북할 수 있게 초청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를 김 위원장이 수락했다. 실제로 이 직후 교황은 남북 양쪽에서 초청장을 받았다. 하지만 교황은 북한의 종교적 자유 불허 등을 이유로 응하지 않았다. 또 2014년 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때 북한에 갈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돌았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이번 교황 방문은 훨씬 더 오랜 기간, 진지하게 추진돼 왔다. 천주교 신자인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때부터 남북 화해의 방법으로 교황의 방북을 검토했다고 했다. 그리하여 취임 직후인 2017년 5월 말 김희중 대주교를 교황청 특사로 보내 "남북 정상회담을 중재해 달라"는 친서를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전했다. 그러다 2018년 9월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지자 교황 방북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반도 평화에 관심이 많으니 한번 만나보는 게 어떠냐”고 하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교황님이 평양을 방문하시면 열렬히 환영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후 한 달 뒤인 그해 10월 문 대통령이 로마를 방문해 교황에게 김 위원장의 초청 의사를 전하면서 방북 문제는 급진전하는 듯했다. 하지만 넉 달 뒤인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교황 방북은 또다시 좌절됐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북 문제가 지난 7월부터 활발하게 재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교황 방북설에 불을 붙인 건 박지원 국정원장이었다. 박 원장은 지난달 5일 전남 목포 신정동 성당에서 열린 미사에 참석해 "교황의 방북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김희중 대주교, 주한 교황대사인 알프레드 슈에레브 대주교 등이 참석한 가운데 밝힌 터라 이 발언은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나흘 뒤에는 로마에서 방북 이야기가 나왔다. 로마를 방문한 박병석 국회의장이 교황청 2인자이자 국무원장인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북한에 가고 싶어하며 초청장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이탈리아 현지 언론인 '라 레푸블리카'도 같은 달 7일 "결장협착증 수술은 받은 교황이 순조롭게 회복하고 있다"면서 "교황이 평화 외교 재개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으며 오는 9월 순방 예정인 헝가리·슬로바키아 외에 레바논과 북한에 갈 가능성도 있다"고 보도했다.
 이뿐 아니라 지난 6월 유흥식 대주교가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으로 임명된 것도 교황 방북에 긍정적 요인이 될 거로 보는 시각이 많다. 실제로 유 대주교는 교황의 방북 가능성을 묻자 "어느 때보다 높다"면서 가교 역할을 하느냐는 질문에 "할 수만 있다면 큰 영광"이라고 답했다.
 이렇듯 현 정권 핵심들이 여기에 공을 들이는 것은 교황 방북 카드가 가진 잠재력 때문이다. 평화와 자비의 상징인 교황이 방북하면 시들해진 북한 문제에 전 세계적 관심이 쏟아질 게 분명하다. 이를 멈춰버린 남북 및 북·미 간 대화와 교류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을 거로 현 정권은 기대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함께 교황 방북을 징검다리로 활용하면 내년 초 베이징 올림픽에서 또 한 번의 남북 정상회담을 기대할 수 있다는 대목이다. 남북 교류를 최대 치적으로 삼아 내년 대선을 치르려는 이번 정권으로서는 교황 방북이 놓쳐서는 안 될 회심의 카드인 셈이다. 오는 10월 로마 G20 정상회담 때 문 대통령이 교황을 만나 방북 문제를 논의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교황 방북 추진의 역사

교황 방북 추진의 역사

남·북한에 예상되는 각종 득실  
만약 교황의 방북이 성사된다면 빈손으로 가진 않을 거라는 얘기가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가장 그럴듯한 시나리오는 식량이나 백신을 선물로 가져간다는 거다. 현재 북한은 경제 제재에다 코로나 차단을 위한 국경 봉쇄 및 지난해의 대규모 수해로 경제가 극도로 악화했다. 이로 인해 심각한 식량 부족 사태가 발생해 50만~60만 명이 굶어 죽었던 1990년대 말 고난의 행군 이래 최악이란 이야기마저 나온다. 이런 터라 교황이 인도적 차원에서 남한의 쌀을 가져다 풀겠다면 반대 목소리는 그리 심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지난해는 좋지 않은 작황 탓에 올 들어 쌀 재고가 줄긴 했지만, 풍년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까닭이다. 반면 코로나 백신의 경우 국내 공급도 달리는 상황에서 이를 북한에 주겠다고 하면 거센 반대가 일 공산이 크다.

2015년 9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쿠바의 수도 하바나에서 이 나라의 공산 혁명을 주도했던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 [AP]

2015년 9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쿠바의 수도 하바나에서 이 나라의 공산 혁명을 주도했던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 [AP]

 이런 상황 속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북이 실현될 경우 남북 모두에게 큰 영향을 줄 게 분명하다. 우선 남쪽으로서는 빈사 상태에 빠진 남북 관계를 되살릴 동력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교황의 방북으로 인해 김정은 정권이 정상국가처럼 비칠 수 있다는 건 심각한 문제다. 비핵화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교황청이 김정은 체제를 인정하는 것처럼 비치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북한이 핵 보유를 기정사실로 하고 서방 측과 비핵화가 아닌 핵 감축 협상을 하자고 나올 게 뻔하다. 또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비난도 수그러들 가능성이 크다.

 한편 북한으로서는 교황 방북을 정상국가로서의 위상을 굳히는 동시에 대북 제재를 허무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 성사되진 않았지만, 북한이 동구 공산권이 무너진 직후인 199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초청한 것도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당시 교황은 북한에 종교적 자유가 없다는 이유로 방북하지 않았다. 또 교황 방북을 계기로 쌀 지원이라도 이뤄진다면 심각한 식량 부족문제를 해소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북한은 교황 방북을 계기로 북녘땅에 외부 세계로부터의 새로운 바람, 특히 종교적 자유에 대한 요구가 확산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어쨌거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북은 본인이 강력히 희망하는 데다 한국 정부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어 성사 가능성이 적잖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김정은 정권은 교황 방북에 따른 체제상의 부담으로 쉽게 수용하긴 어려워 보인다. 결국 교황 방북 성사 여부는 어떤 조건으로 진행될지가 결정적 변수로 작용할 게 틀림없다.
 만약 북한이 선물만 달랑 챙기고 종교적 자유와 인권문제 등을 제기할 기회를 아예 주지 않는다면 교황이 안 가느니만 못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평양에 가게 된다면 이를 북한의 비핵화와 인권 탄압 해소를 위한 결정적 계기가 되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