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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복룡 기고

‘착하지 않은 사마리아인’과 공존할 지혜 배울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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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국치일 111주년과 한·일 관계

신복룡 특별기고

신복룡 특별기고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5번 승강장 앞에 서서 열차를 기다릴 때면 마음이 매번 착잡하다. 5번 승강장의 스크린도어에는 항일시(詩)가 나붙어 있는데, 글을 지은 이는 이봉창(李奉昌) 의사다. 그 마지막 구절은 ‘왜놈을 도륙하자’는 내용이다. 도륙(屠戮)은 푸줏간에서 소나 돼지를 칼로 저며서 나눈다는 뜻이다. 왜 이런 시를 여기에 붙여 놓았는지 궁금했다. 관할 부서에 물어봤더니 “왜놈(일본) 대사관에 가려면 안국역에서 내려야 하기 때문”이라거나 “안국역 일대가 독립운동의 거리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한국에 오는 일본인이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심정이 어떨까. 이것은 문명국가에서 할 일이 아니다. 입장을 바꿔 보자. 일본 도쿄 긴자(銀座) 전철역에 ‘조센징(조선인) 저며 죽이자’는 글을 써 붙였다면 이를 본 한국인의 심정은 어떨까. ‘왜놈을 도륙하자’는 시구를 보고 착잡함을 느낀다면 ‘토착 왜구(倭寇)’로 공격당할지도 모르겠다.

나라를 잃은 건 우리 모두의 책임
정적만 할퀴는 친일파 논란 유감
‘일본 콤플렉스’ 당당히 벗어나되
안보 생각하면 일본과 함께 가야

111년 전인 1910년 8월 27일 일제의 한·일병합 조약 서명 전후의 조선은 자신도 모르게 일본에 길들어가고 있었다. 친일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친일인지도 모른 채 익숙해지고 있었다. 1926년 이완용의 장례식 운구 행렬은 십 리나 이어졌고, 고종(高宗) 국장 이후 가장 화려했다. 애국지사들에게는 참으로 송구한 말이지만, 그 시대 한국인들은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해 군수나 판사로 출세하고 타쿠시(taxi)를 타고 종로 화신백화점에서 쇼핑하는 사람을 부러워했다.

을사5적·정미7적만 죄인인가

안중근 의사가 1910년 2월 사형 판결을 받았을 때 한국인들은 한반도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죽음을 사죄하는 사절단, 즉 대죄단(待罪團)을 조직하고 이토를 추모하는 동상을 제작해 활불(活佛)로 추앙했다. 이토를 추모하는 절 박문사(博文寺)를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짓고, 이토의 호 ??보(春畝)를 따서 뒷산을 춘무산(春畝山)이라 불렀다.

우리는 친일의 흑역사 청산을 외치며 친일파로 으레 을사5적(이완용·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과 정미7적(이완용·임선준·조중응·이병무·이재곤·송병준·고영희)을 거론한다. 물론 그들이 역사에 지은 죄를 사면받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들이 망국의 모든 원인을 초래한 것은 아니다.

반일을 외친 사람들이 과연 당시의 사태를 정확히 직시했는지도 의문스럽다. 이를테면 김구가 “일제시대 국내에 남아 있던 사람은 모두 친일파였으므로 모두 감옥에 가야 한다”(Mark Gayn, Japan Diary)고 주장했을 때 여운형은 아연실색하며 “국내파 민족주의자들의 고통을 모르는 언행”이라며 반발하고 김구와의 제휴를 포기했다.

해방되자 이승만은 친일 재벌 장진영의 돈암장(敦岩莊)에서 살았고, 김규식은 친일 재벌 민규식의 삼청장(三淸莊)에서 살았다. 박헌영은 전북 익산 지주 김해균의 혜화장(惠化莊)에서 살았고, 김구는 금광 재벌 최창학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살았다. 경교장은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 (竹添進一郞)가 살던 집이다.

일제의 멸망을 발 빠르게 감지한 친일 재벌들은 각자 집 한 채씩을 싸 들고 당대의 실력자들을 찾아가 읍소하며 구명 운동을 전개하기로 담합한 흔적이 보인다. 그런 때묻은 재산은 ‘받아 마땅한 대접’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모두 죄인이고 망국의 책임자다. 지금의 친일 논쟁은 ‘먼저 태어난 자의 슬픔과 늦게 태어난 자의 행운’이 빚은 갈등이다.

해방 정국에서는 물론이고 현대사를 통틀어 친일 논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이승만일 것이다. 공적(公敵)이 필요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무리에게 친일은 이승만에게 ‘너울’을 씌우는 구실로 이용됐다. 그러나 엄밀히 살펴보면 이승만의 초대 내각에서 각료 13명 중에 친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그런데도 반(反) 이승만 계열이 이승만과 한민당을 친일로 몰아붙였을 때 곧바로 반격하지 않으면 설 땅이 없다는 것을 이승만 진영은 잘 알고 있었다. 미군정에서 경찰 총수를 역임한 조병옥이 반격의 선봉에 섰다. 그는 정치판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친일 비리를 꿰뚫고 있어서 할 말이 많았다. 그래서 나온 논리가 “친일(pro-Jap)은 먹고살다 보니 저지른 일(pro-Job)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의 가진 자들 가운데 구한말부터 일제시대와 해방정국에 이르기까지 100년의 역사를 살아온 조상 9족, 즉 3족(친가·처가·외가) 3대(아버지·할아버지·증조부)의 이력서·족보·호적등본·제적등본을 내놓고 “우리 집안은 정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는 집안이 과연 몇이나 될까. 노비와 화전민을 빼고 보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그 9족 가운데 애국자가 없는 가문도 거의 없다. 민망하지만 우리는 그 시대를 그렇게 살아냈다.

다시 국난이 온다면 우리는 조국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모두 장담할 수 있을까. 솔직히 필자부터 100% 장담할 수는 없다. 거대한 국가 폭력 앞에서 한 개인이 저항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흥망성쇠를 겪으면서 의인이 없었던 적도 없지만, 역사적으로 애국자가 넘쳐나는 시대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망국의 원인을 몇 명의 친일파에게 몰아서 추궁함으로써 망국이라는 거대 담론을 희석했다.

필자는 “친일파에게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논리에 법률적 하자가 없는지를 가끔 생각해 본다. 우리는 지금 친일파를 색출하는 것이 아니라 ‘친일파의 자식’을 색출하고 있다. 『삼국지』를 보면 조조(曹操)가 원소(袁紹)에게 대승을 거두고 전리품을 살피던 중 자기 부하들 가운데 원소와 내통한 편지가 많이 나왔다. 주변 사람들이 “내통한 놈들을 모조리 죽이자”고 건의했을 때 조조는 그 편지들을 모두 태워버리고 다시 그 문제를 따지지 않았다.

인종차별 문제 권위자인 영국의 앤드루 릭비는 “과거사 청산은 정적(政敵) 할퀴기가 돼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영토도 없고, 국가도 없고, 국민도 없는 상황에서 한 개인이 우국적 기개만으로 항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논리가 망국의 책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논리가 돼서는 안 되지만, 4년 동안 적의 치하에서 살았던 부역자를 처리하지 못한 프랑스와는 경우가 다르다. 예로부터 거부(巨富)는 망국의 순간이나 잔혹한 전쟁을 딛고 나타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망국을 초래한 그들의 죄상을 역사에 기록해 두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우리는 과거를 껴안고 살며, 과거와 함께 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과거와 함께 살아가는 법 익혀야

이제는 우리가 일본에 가위눌리며 살 이유가 없다. 2020년 기준 1인당 총소득(GNI)은 일본이 4만1580달러이고 한국이 3만2860달러였다. 국가별 물가를 반영한 빅맥지수로 따져보면 한국이 일본보다 훨씬 풍족하게 산다. 이제는 ‘일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도 된다는 말이다.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일본 편에 따르면 섬 민족은 이웃에게 상처를 많이 입히기 때문에 섬 민족을 이웃으로 두고 있는 민족은 괴로움이 많은 법이다. 일본 옆에 있는 우리도 지정학적 숙명에서 예외는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일관계를 어떻게 이어가야 할 것인가.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는 라틴어 격언을 되새겨본다. 지금 정부와 노선이 달랐던 지난 정부에서 약속한 것이라고 지킬 수 없다는 논리는 하지하책(下之下策)이다. 일본 우익들은 “저것도 나라냐”고 힐난하고,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일본 내 소수 지한파 지식인들마저 이탈하게 한 것은 문재인 정부 책임이다.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따르면 조선 초기 ‘현실주의 외교의 달인’으로 불렸던 신숙주(申叔舟)가 1475년 운명할 때 성종(成宗)이 도승지를 보내 “경(卿)이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이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신숙주는 “일본과 등지지 마십시오(不失和日本)”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임진왜란 100여년을 앞둔 시점이었다. 중국이 급부상한 21세기에 안보를 생각하면 신숙주의 유언은 여전히 한·일 관계에 유효하다. 과거에 대한 지나친 집착도, 과도한 기대도 실망도, 일희일비(一喜一悲)도 정답이 아니다. 체념할 것은 체념하면서  ‘착하지 않은 사마리아인’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적 과제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