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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언론징벌법 날치기, 역사가 심판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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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여당 어제 국회 법사위 일방처리, 30일 본회의

언론자유 훼손…당·청 말고는 모두 반대

"언론 침묵은 국민 신음" 말한 대통령이 막아야

민주주의 후퇴시킨 책임은 대통령 몫이다

어제 새벽 4시 더불어민주당이 국회 법사위에서 ‘언론징벌법’을 일방처리했다. 이제 30일 국회 본회의와 문재인 대통령의 재가만 남았다.

여권 앞엔 전례 없이 거센 반대의 벽이 있다. 국민의힘·국민의당뿐 아니라 정의당이 반대하고, 국내 언론계·학계·법조계뿐 아니라 세계 주요 언론단체들도 반대한다. 여권의 오랜 우군들도 “자충수”(유인태 전 의원)라고 우려한다. 민주화 이후 초유의 고립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선 듣도 보도 못한 ‘악법’이기 때문이다. 곳곳에 위헌 소지가 가득하다. 이 법은 허위·조작 보도로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언론사에 피해액의 5배까지 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도 형사처벌이 가능한 상황에서 징벌적 손해배상까지 도입하는 건 이중·과잉처벌 소지가 크다. ‘고의·중과실의 추정’ 조항은 자의적이고 모호하다. 입증 책임을 언론사(피고)가 지게 했다는 논란도 있다. 오보라 하더라도 원고(피해자)가 언론사의 ‘현실적 악의’를 입증해야 하는 미국과 천양지차다. ‘기사열람차단 청구권’도 사실상 기사를 삭제하는 쪽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개인의 인격권과 언론의 자유가 충돌할 때 일방적으로 언론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다.

어제 ‘친문 강성’들이 주도한 법사위에서 독소조항이 더 독해졌다. 징벌적 손해배상 적용의 전제 조건으로 ‘언론 등의 명백한 고의 또는 중과실이 있어야 한다’는 조항에서 ‘명백한’을 뺐다. 고의·중과실 조항에서도 ‘피해를 가중시킬 경우’ ‘회복하기 어려운 경우’를 삭제했다. 이로 인해 “법안이 확대돼 남용 가능성이 훨씬 커진”(양승함 연세대 명예교수) 결과를 낳았다.

더불어민주당 김남국 의원(왼쪽 부터), 박주민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직무대리, 김승원, 김영배 의원 등이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뒤 인사를 나누고 있다. 김경록 기자

더불어민주당 김남국 의원(왼쪽 부터), 박주민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직무대리, 김승원, 김영배 의원 등이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뒤 인사를 나누고 있다. 김경록 기자

이런 법안이 예전에도 있었다면 태블릿PC 보도가 가능했겠는가. 최순실씨가 일부 사실과 다른 내용을 들어 거액의 손배소를 제기했다면 말이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과 윤미향 의원, 그 가족들이 인격권을 내세워 기사 열람 차단을 요구했다면 그들의 ‘내로남불’ 세계가 드러났겠나. “과거의 독재 권력이 힘으로 언론을 겁박했다면 이제 돈으로 언론을 겁박하는 시대가 될 것”(이정미 정의당 전 대표)이란 비판이 나온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눈과 귀를 막은 채 170여 석으로 밀어붙인다. 놀라운 독선이자 오만이다. 아니면 무조건 돌파해내야 하는 정치적 승부처라고 보는 건가. 언론의 감시와 견제로부터 비켜 있겠다는 건가. 겉으론 ‘국민의 피해 구제’를 내세우지만, 속내론 ‘민주당 구제’를 염두에 두는 건 아닌가. 부당한 욕망이다.

이런 가운데 청와대의 침묵은 오히려 도드라져 귀청이 떨어질 지경이 되고 있다. “청와대가 전혀 관여할 일이 아니다”란 입장이라지만 문 대통령이야말로 이해당사자다. 행정부 수반으로 곧 법률안에 재가해야 한다. 그때도 침묵할 텐가. 그는 야당 시절 “보도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명예훼손으로 수사·기소하는 것은 잘못된 일” “공인에 대한 비판·감시는 폭넓게 허용해야 한다”고 했다. 최순실씨 사건 때엔 “언론의 침묵은 국민의 신음”이라고 했었다. 최근에도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 기둥”이라고 말했다. 과거의 문 대통령이 지금의 문 대통령에게 답을 요구하고 있다.

더욱이 문 대통령은 언론징벌법의 직접 수혜자일 수 있다. 내년에 누가 정권을 잡든 그간 억눌러 뒀던 권력형 비리가 터져나올 텐데 문 대통령이 이 법에 의탁하고 싶어지지 않겠나. 그래서 지금의 처신은 비겁할 뿐만 아니라 부당하다.

진정 안타까운 건 문 대통령과 집권세력의 기억력이다. 노무현 정부 말기에 ‘취재 지원 선진화 방안’이란 이름으로 언론의 자유를 옥죄었다.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었던 문 대통령은 자신의 저서 『운명』에서 이를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철저한 실패였다. 이번의 경우 법률안인 데다 민주당이 2024년까지 다수당일 터라 진정한 ‘대못’이라고 믿는 건가. 그렇다면 순진하다. 역사의 법정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언론징벌법 날치기로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최종 책임은 고스란히 문 대통령의 몫이다. 이제라도 막지 않으면 역사가 반드시 심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