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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본이 80%…‘얼굴없는 예술가’ 뱅크시 서울전 논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현재 서울 성수동에서 열리고 있는 ‘아트 오브 뱅크시’ 전시의 작품들. 대부분의 작품은 복제품이며 테마파크 형식으로 배치됐다. 이은주 기자

현재 서울 성수동에서 열리고 있는 ‘아트 오브 뱅크시’ 전시의 작품들. 대부분의 작품은 복제품이며 테마파크 형식으로 배치됐다. 이은주 기자

지난 22일 서울 성수동 갤러리아 포레 상가 지하 전시장. 약 30여 명이 출입구 앞에 길게 줄 섰다. 전시장 직원들은 “입장하려면 약 30분 정도 걸린다”고 설명했다. 세계적인 화가 뱅크시의 이름이 붙은 ‘아트 오브 뱅크시:위다웃 리밋(Art of Banksy:Without Limits)’전시다. 관람료는 2만 원. 25일 현재 사전 예약 인원만 3만명이라고 한다.

이 전시는 20일 개막 때부터 ‘짝퉁 전시’ 논란이 일었다. 주최사 LMPE는 ‘아시아 최초’ ‘오리지널(원본) 포함 150여 점’을 내세웠으나 그 중 오리지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27점. 나머지 120여점은 레플리카(복제본)다.

현재 서울 성수동에서 열리고 있는 ‘아트 오브 뱅크시’ 전시의 작품들. 대부분의 작품은 복제품이며 테마파크 형식으로 배치됐다. 이은주 기자

현재 서울 성수동에서 열리고 있는 ‘아트 오브 뱅크시’ 전시의 작품들. 대부분의 작품은 복제품이며 테마파크 형식으로 배치됐다. 이은주 기자

게다가 뱅크시는 소셜미디어 등에서 “내 이름을 내건 전시회 중 나와 합의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이름을 내건 모든 전시는 가짜(FAKE)”라고 밝혔다.

뱅크시는 ‘얼굴 없는 예술가’로 유명한 영국 출신 작가다. 1990년대부터 게릴라처럼 벽에 낙서하듯 남긴 그림에서 전쟁과 불평등, 현대인의 속물근성 등을 재치있고 날카롭게 풍자했다. 작품은 경매에서 100억~200억원 대에 거래될 정도로 인기이지만, 그는 철저히 신원을 숨기고 있다.

현재 서울 성수동에서 열리고 있는 ‘아트 오브 뱅크시’ 전시의 작품들. 대부분의 작품은 복제품이며 테마파크 형식으로 배치됐다. 이은주 기자

현재 서울 성수동에서 열리고 있는 ‘아트 오브 뱅크시’ 전시의 작품들. 대부분의 작품은 복제품이며 테마파크 형식으로 배치됐다. 이은주 기자

서울 전시에 대해 주최사는 “뱅크시의 작품 세계를 공유하는 관객 참여형 전시로, 아시아 최대 규모”라며 "‘풍선과 소녀’ ‘폴리스 키즈’ 등 대표작을 재현하거나 사진, 조각 등 재료로 구현한 판화들로 전시했다”고 밝혔다. LMPE 박봉수 본부장은 본지 인터뷰에서 “P.O.W(과거 뱅크시 작품 공식 인증기관)가 인증한 27점 외 나머지는 모두 레플리카”라고 밝혔다. 다만 “월드투어 기획사에서 보내준 레플리카라는 것”이다.

현재 해외 곳곳에선 ’아트 오브 뱅크시‘란 타이틀로 두 종류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프라이빗 컬렉션’이라는 부제의 전시는 컬렉터들로부터 대여한 80여 점의 원본(400억원 가치)을 포함한 것이고, ‘위다웃 리밋’은 “원본보다 작가의 메시지에 집중했다”는 전시다.

“현재 열리고 있는 모든 뱅크시 관련 전시는 ‘승인받지 않은 것’”라고 밝힌 페스트 컨트롤 홈페이지 공지 문구. [사진 페스트 컨트롤]

“현재 열리고 있는 모든 뱅크시 관련 전시는 ‘승인받지 않은 것’”라고 밝힌 페스트 컨트롤 홈페이지 공지 문구. [사진 페스트 컨트롤]

현재 뱅크시의 공식 작품 보증기관이자 작품 판매를 주관하는 페스트 컨트롤 역시 문답 형식의 공지문을 통해 뱅크시 관련 모든 전시가 ‘가짜(FAKE)’라고 밝혔다. 홈페이지는 “뱅크시는 현재 열리는 어떤 전시와도 관계없다. 그 전시는 쓰레기일 수 있으니, 여기 와서 환불 요청을 하지 말아달라”고 공지했다.

‘익명’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저작권은 어떻게 될까. 예술품 관련 법제를 연구해온 캐슬린 김 미국 변호사는 “허락받지 않은 전시는 엄연히 저작권 침해”라고 말했다. 그는 “뱅크시는 예술은 동시대의 메시지를 담아야 하고 공유돼야 한다는 입장이라 저작권 침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뿐, 뱅크시가 레플리카나 리프로덕션을 만들어 상업적으로 이용하도록 동의한 것으로 볼 순 없다”고 말했다. 작가가 법적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을 악용한 상술이라는 지적이다.

또 다른 미술 관계자는 “이것은 상식과 윤리의 문제다. 뱅크시 그림으로 전혀 엉뚱한 사람들이 돈을 버는 ‘봉이 김선달’의 21세기 버전 아니냐”고 반문했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오마주란 작가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그 감독이나 작가가 만든 영화의 대사나 장면을 인용하는 것을 가리킨다”며 “레플리카로 채운 것은 오마주 전시가 아니다”고 말했다.

이런 논란의 배경에는 ‘현대 미술계 이단아’ 뱅크시의 정체성도 있다. 그가 남의 건물 벽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부터 ‘불법’이다. 또 뱅크시는 작품을 통해 현대 상업미술 시스템을 조롱해왔다.

이를테면 2006년 연작 ‘모론(Morons)’은 미술품 경매를 풍자하고 조롱한다. 이 작품에는 사람들이 붐비는 경매장이 그려져 있는데 입찰 중인 그림에는 “너희 멍청이들이 진짜 이 쓰레기를 사다니 믿을 수 없군(I can’t believe you morons actually buy this shit)”이라고 적혀있다.

2018년 10월 소더비 경매에선 그의 작품 ‘풍선과 소녀’가 불꽃 튀는 경합 끝에 104만 파운드(약 15억원)에 낙찰되는 순간, 캔버스 뒤에 설치된 파쇄기에 의해 작품이 잘게 잘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튿날 뱅크시는 “몇 년 전 이 작품이 경매에 나갈 경우를 대비해 은밀하게 파쇄기를 설치했다”고 밝혔다.

일부 전문가들은 뱅크시가 기존 미술 제도를 풍자해온 점을 고려할 때 쟁점은 작가의 동의 여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이 전시가 과연 뱅크시가 추구해온 거리 예술운동 정신에 부합하느냐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

박봉수 본부장은 “뱅크시의 작품에서 벽 자체를 뜯어오지 않는 이상 ‘원본’은 큰 의미는 없다고 본다”며 “방법이 없어 뱅크시로부터 인증받지 못했을 뿐, ‘아트 오브 뱅크시’ 월드투어 기획사와 긴밀한 계약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했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는 “복제 작품도 얼마든 전시할 수 있다. 그러나 복제임을 명시하는 것이 전시의 기본이고, 관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강조했다. ‘최악의 전시’라는 부정적인 견해가 나오는 등 이 전시의 완성도 논란에 대해서는 “전시장을 찾는 관객도 이제 스마트해질 필요가 있다.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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