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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391명 구출 '2만km 미라클'···美가 준 결정적 아이디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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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한국의 아프가니스탄 재건 사업에서 두 개의 심장과도 같았던 바그람 한국 병원과 바그람 한국 직업훈련원.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 탈레반은 아프간을 장악한 뒤 두 건물을 폭파해버렸다. 그리고 이곳에서 일했던 아프간 현지인 조력자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제발 구해달라”는 이들의 간절한 외침. 여기에 대한민국이 응답했다.

한국행을 위해 수송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는 아프간 현지인 조력자들. 사진 외교부

한국행을 위해 수송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는 아프간 현지인 조력자들. 사진 외교부

사선 넘은 현지인들, 26일 인천 도착

아프간 현지인 조력자와 직계가족 391명(76가구)을 태운 비행기는 26일 오전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이번 수송 작전의 이름은 ‘미라클(miracle)’, 기적이었다.

 카불 공항에서 우리 군 수송기에 탑승 중인 아프간 현지인 조력자 및 가족들. 연합뉴스

카불 공항에서 우리 군 수송기에 탑승 중인 아프간 현지인 조력자 및 가족들. 연합뉴스

“목숨이 담보되지 않은 가운데 사선을 넘어 새로운 선택을 한 분들에게 희망을 주자는 의미와 아프간까지 약 2만km를 왕복해 적진에 들어가는 작전은 우리 군도 처음 해보는 것이라 성공적 수행을 기원하는 의미”(국방부 당국자)에서 지은 작전명이었다.

25일 외교부 고위 당국자에 따르면 아프간 현지인 조력자들을 국내로 수송하기로 결정한 뒤 당초 정부는 전세기 등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탈레반이 예상보다도 너무 빨리 카불을 장악하면서 모든 계획이 무산됐다.

당국자는 “3~6개월 정도는 버틸 것이라는 전망과 달리 15일에 탈레반이 카불로 진입했고, (항공사와)계약서 서명만 남았던 우리의 민항기 이용 계획도 물거품이 돼 버렸다”고 설명했다.

민간 공항 닫히자 바로 군 수송기 준비

카불 민간 공항이 곧바로 폐쇄되면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군 공항뿐.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공군 등은 주한미군과 협력해 곧바로 군 수송기 투입을 결정했다.

외교부는 인접국인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 공항을 수송 작전의 베이스 캠프로 이용하기 위한 외교적 교섭을 담당했다.

마침 13~17일 터키를 방문 중이었던 박병석 국회의장도 터키 측 카운터파트를 만나 협조를 요청하는 등 측면 지원에 나섰다. 현재 터키군이 미국의 요청으로 카불 공항 경비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행을 택한 아프간 현지 조력자와 가족들이 정부가 발급한 대한민국 여행증명서를 받은 뒤기뻐하고 있다. 사진 외교부

한국행을 택한 아프간 현지 조력자와 가족들이 정부가 발급한 대한민국 여행증명서를 받은 뒤기뻐하고 있다. 사진 외교부

정부 차원에서 한국 행을 원하는 현지인 조력자들과는 계속 소통이 이뤄졌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어쨌든 이들이 카불 공항까지는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자력으로 와야 했고, 도착한 뒤에도 공항 게이트 근처에 2만여명이 운집한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통과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수만 명 운집 공항 게이트, 버스 태워 통과

실마리는 웬디 셔먼 미 국무부 부장관이 주재한 20개국 차관회의에서 풀렸다. 두 번째 회의까지만 해도 별다른 수가 없었는데, 세 번째 회의가 열린 22일 ‘버스 모델’을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미국이 냈다.

미국이 거래하고 있는 아프간 내의 버스 회사들과 각기 계약해 버스로 게이트를 통과시키자는 계획이었다. 때마침 정부는 현지인 조력자 수송 작전 지원을 위해 22일 제3국으로 피신시켰던 주아프간 대사관 공관원 4명을 다시 카불에 투입한 터였다. 이들은 미국으로부터 연락처를 받아 버스 회사와 접촉, 이튿날인 23일 버스 6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 인근에서 우방국 병사가 한국 외교관들과 함께 한국행 아프간인들을 찾고 있다. 사진 외교부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 인근에서 우방국 병사가 한국 외교관들과 함께 한국행 아프간인들을 찾고 있다. 사진 외교부

동시에 현지의 미군은 접선 장소 두 곳을 정해 현지인 조력자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24일 정해진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던 버스가 약속한 시간에 모인 이들을 태워 공항에 진입할 수 있었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차관회의에서 미국 동맹국, 우방국들의 우려가 다양하게 전달됐다”며 “탈레반이 아프간인을 태운 버스에 대해 검문검색도 실시했지만 우리 조력자들을 태운 버스는 무사히 공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미국과 탈레반이 정치 협상 중이었던 덕에 통과가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의 지원을 받아 미국의 동맹인 한국으로 수송하는 인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슬라마바드-카불 왕복, 수송기 대피작전

이들이 공항까지 무사히 들어온 뒤에는 한국이 급파한 수송기가 활약할 차례였다. 정부가 투입한 수송기는 모두 3대. 공군 다목적 공중급유수송기 KC-330 시그너스 기종이 한 대, 군용 수송기 C-130J가 두 대였다.

KC-330은 공중급유를 하는 ‘하늘의 주유소’ 역할과 병력 수송 및 재외국민 긴급 소개 임무 등을 위해 도입된 기종이다. 300여명의 인원을 수송할 수 있다. 국방부 당국자는 “KC-330은 (무력 공격 등 상황에서)대응 능력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C-130J도 함께 투입했다”고 설명했다.

수송기 세 대가 이슬라마바드 공항에 도착한 것은 23일 저녁(현지시간)이었다. KC-330은 이슬라마바드 공항에 대기하고, C-130J가 카불 공항을 오가며 수송 인원들을 실어 나르는 방법으로 대피가 이뤄졌다. 1진 26명은 24일 무사히 카불에서 이슬라마바드로 넘어왔고, 나머지 인원들도 25일 오후 수송을 완료했다.

카불 공항에서 아프간인 수송 지원을 지휘한 주아프가니스탄 김일응 공사참사관이 한 현지인과 끌어안으며 인사하고 있다. 사진 외교부

카불 공항에서 아프간인 수송 지원을 지휘한 주아프가니스탄 김일응 공사참사관이 한 현지인과 끌어안으며 인사하고 있다. 사진 외교부

당초 정부가 파악한 수송 인원은 427명인데, 실제 대피가 이뤄진 건 391명이다. 나머지 36명은 결국 현지에 잔류하기로 선택했거나, 제3국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한국 행을 원한 이들은 100% 수송에 성공했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정부는 나중에라도 한국에 오길 원하는 현지인들이 있다면 지원책을 강구하겠다는 입장이다. 다만 수송기 투입 등을 통한 대규모 작전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영유아 100여명…젖병까지 챙겨보내

한국 행을 택한 391명의 나잇대를 사전에 분석해보니 중 5세 미만인 영유아가 100여명이나 됐다. 이에 정부는 처음부터 분유와 젖병 등을 수송기에 실어 보냈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8월에 태어난 신생아도 3명 있었다. 공항에 진입하기 전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버스 안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해서 걱정이 컸는데, 다행히 모두 건강하게 공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번 작전에 60~70명을 투입했는데, 여기엔 응급 상황에 대비한 의료인력 등도 포함됐다.

현지인 조력자 391명은 KC-330과 C-130J 등 두 대에 나눠타고 한국까지 오게 된다. 당초 KC-330에만 태울 계획이었는데 짐이 많아 한 대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C-130J는 원래 군용 수송기라 화물용 짐칸으로 돼 있는데, 인원 수송을 위해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기도 했다.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이 25일 청와대 브리핑룸에서 한국 조력 아프간인 국내 이송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뉴스1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이 25일 청와대 브리핑룸에서 한국 조력 아프간인 국내 이송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뉴스1

문재인 대통령은 25일 오후 “우리 정부와 함께 일한 아프가니스탄 직원과 가족들을 치밀한 준비 끝에 무사히 국내로 이송할 수 있게 돼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를 도운 아프간인들에게 도의적 책임을 다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도 강조했다.

“우리 동지들…못 데려왔다면 처형당했을 것”

실제 이들은 단순한 피고용인이 아니라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지였다는 게 재건 사업에 참여한 이들의 증언이다. 공덕수 전 바그람 직원훈련원장은 “우리 훈련원에서는 아프간 젊은이 1000여명에게 기술 훈련을 제공했고, 전원이 미국계 회사에 취업했다. 약 5년 간 이뤄진 관련 사업은 통역원들과 교사들 등 현지인들의 헌신적인 협력이 없었다면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들은 긍지를 갖고 한국을 위해 일했던, 전쟁터에서의 동지 같은 관계였다”며 “이들을 구하지 못하고 그냥 뒀다면 탈레반에 의해 처형될 것이 확실한 상황이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편 정부는 수차례에 걸쳐 391명에 대한 신원 조사를 실시했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대부분이 우리와 7~8년씩 일했던 장기 근무자들이고, 한국에도 이들을 아는 사람들이 많다. 처음 채용할 때부터 철저한 신원 조회를 했고, 이번 수송 전에는 관계기관 전문가가 카불까지 가서 전원에 대한 백그라운드 체크를 일일이 다시 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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