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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잎'으로만 산 60여년, 끝내 꽃이 안 될지라도…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 (203)  

조카손주의 배밀이 도전을 보다가 배꼽을 쥐고 웃었다. 아이가 있어야 웃는다는 말이 실감난다. [사진 pxhere]

조카손주의 배밀이 도전을 보다가 배꼽을 쥐고 웃었다. 아이가 있어야 웃는다는 말이 실감난다. [사진 pxhere]

이웃에 살고 있지만, 코로나로 못 만난 조카 손주를 8개월 만에 만났다. 뒤집었다가 도로 눕지를 못해 끙끙대고, 눕혀 놓으면 또다시 뒤집기를 하는 동영상을 보면서 도전 또 도전하는 모습이 신비로웠다. 오늘은 배밀이 도전을 직접 보다가 모두 배꼽을 쥐고 웃었다. 아이가 있어야 웃는다는 말을 실감한다.

앞에 놓인 장난감 공 하나를 잡기 위해 오랜 시간을 힘써 보지만 한 뼘도 진도가 안 나간다. 아예 몇 번이나 뒤로 밀려 멀어져간다. 포기하나 했지만 조금 조금씩 앞으로 나가더니 공을 잡았다. 감동이다. 산다는 게 앞으로만 쭉쭉 나가는 게 아니란 것을 저 어린 천사도 알아챈 걸까?

어린아이를 친정 엄마에게 맡기고 편의점을 경영하는 지인은 ‘이생 폭망’의 허튼 넋두리를 하며 웃는다. 많이 안아주지 못해 미안해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엄마의 모습만으로도 아이는 엄마를 기억하고 기운을 준다며 손자한테 읽어주던 동화책 이야기로 웃음 바다를 만든다.

손자가 주워온 대추에는 할머니와 엄마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다. [사진 pxhere]

손자가 주워온 대추에는 할머니와 엄마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다. [사진 pxhere]

할미가 안고 키운 여섯 살 어린 손자가 지친 몸으로 일터에서 돌아오는 엄마를 보자 대추 두 알을 주워 내민다. 한 알은 쭈글쭈글하고 한 알은 반들반들하다. 할머니와 엄마는 어떤 걸 내게 줄 것인가 아이를 바라보며 그윽한 사랑을 보낸다.

“아이고 이쁜 내 새끼…. 손자 키운 보람이 있었구나.” 쭈구렁탱이를 받아 든 엄마는 그래도 고생하는 친정엄마가 웃는 모습에 기운이 난다. 할머니는 반들반들한 대추 한 알을 자신의 손에 쥐여 주는 손자가 예뻐 죽겠다.

할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가니 아이가 엄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엄마. 할머니 건 똥 밭에 떨어진 거야.”

남편을 먼저 보내고 마을버스 운전을 하며 열심히 사는 지인이 자랑할 일이 생겼다며 흥분한다. 어떤 상을 받았을까 생각하는데 방향이 전혀 다른 자랑거리다. 작고 소박한 옥탑방, 고불고불 골목을 지나 언덕을 올라야 보이는 작은 집이지만 골목길까지 틈틈이 내 집처럼 아름답게 가꾸었다. 그런데 지나가는 어느 방송작가의 눈에 띄어 영화 제작팀에 빌려준 대가로 거금을 받은 것이다.

오늘 읽은 책 한 줄에 밑줄을 그었는데 지인의 이야기가 더 감동으로 다가왔다.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 저자는 열심히 살면서 많은 것에 도전했다. 가작, 입선, 중퇴, 초빙, 객원, 명예…. 이름 뒤에는 떨떠름한 수식이 늘 붙었다. 그러나 한 번도 꽃으로 피어보지 못한 채 잎으로만 살았어도 잘살고 있노라고 자신을 소개한다.(지금은 고인이 되셨다)

나와 함께 하는 이웃, 집, 방, 마당의 풀 한 포기, 가족, 건강, 등등…. 주어진 삶을 모두 끌어안고 사랑을 주다 보니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급기야 내 이름 앞에 붙어 꽃 대접을 받는다. 내 인생도 60여년을 잎으로만 살았지만 행복하다. 끝내 꽃은 피지 않을지라도 사는 날까지 도전하고 배우면서 아름답게 단풍이나 들어야겠다.

오늘자 신문에 올라온 ‘일을 통해 사람은 더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는 교황의 말씀도 마음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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