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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희봉 “원전폐쇄 절차 지켜야? 그말 하려면 청와대 오지마”

중앙일보

입력

채희봉 전 청와대 산업정책비서관. 뉴시스

채희봉 전 청와대 산업정책비서관. 뉴시스

‘월성원전 1호기 경제성 평가 조작’ 의혹과 관련해 이에 앞서 조기 폐쇄를 무리하게 밀어붙이려던 청와대를 상대로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 2명이 “절차를 지켜야 한다”며 반발하자, 채희봉 당시 청와대 산업정책비서관(현 한국가스공사 사장)이 “그런 말 하려면 청와대에 오지 말라”며 입막음한 것으로 검찰 수사 결과 나타났다.

24일 탈원전반대 시민단체 에너지흥사단 등이 공소장 낭독회 행사를 통해 공개한 채 전 비서관과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 등의 공소장에는 이처럼 청와대가 산업부를, 이어 산업부는 한수원을 도미노로 압박한 정황이 포함됐다. 이날은 채 전 비서관 등에 대한 1심의 첫 번째 공판준비기일이 열린 날이다.

문재인 정부가 2017년 5월 취임한 직후 산업통상자원부는 3차례에 걸쳐 “대선 공약대로 월성1호기를 조기 폐쇄하면 1조8000억원가량의 손실이 발생한다”며 반대 입장을 보고했지만, 결국 청와대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고 공소장에 쓰여 있다. 산업부는 “만일 조기 폐쇄를 할 경우 관련 특별법 제정을 선행해야 한다”는 의견도 냈지만, 이마저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등의 이유로 묵살됐다고 한다.

그러자 산업부 공무원 2명은 청와대에 대안으로 “이미 수립된 제2차 에너지기본계획에는 원전을 확대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월성1호기 조기폐쇄 등과 상충하므로 2차 에너지기본계획을 먼저 수정해야 한다”며 “이후 한수원으로부터 조기폐쇄 이행계획을 제출받고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수립한 다음 한수원이 스스로 조기 폐쇄하도록 유도하겠다”고 보고했다.

원자력살리기 국민행동 등 시민단체들이 24일 오후 대전지방법원 앞에서 탈원전 국정농단 공소장 낭독대회를 열고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규탄하고 있다. 뉴스1

원자력살리기 국민행동 등 시민단체들이 24일 오후 대전지방법원 앞에서 탈원전 국정농단 공소장 낭독대회를 열고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규탄하고 있다. 뉴스1

산업부 공무원들 “못 해 먹겠다” “절차 지켜 추진해야”

하지만 채 전 비서관은 또 반대했고, 산업부 공무원 한 명은 “못 해 먹겠다”며 반발했다고 한다. 다른 공무원은 “절차를 지켜야 정당성을 확보하고 국정운영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다”며 거듭 2차 에너지기본계획부터 수정해야 한다고 채 전 비서관에게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자 채 전 비서관은 “그러면 8차 전력수급계획이 얼마나 더 지연되겠냐. 에기본(에너지기본계획)을 수정하겠다는 말을 하려면 청와대에 오지 말라”며 입을 막은 것으로 검찰은 파악했다.

산업부는 결국 2017년 10월 10일부터 2차 에너지기본계획 수정을 포기하는 대신 에너지전환(탈원전) 로드맵을 수립한 뒤 국무회의 의결→한수원으로부터 월성1호기 조기폐쇄 의향 접수→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조기폐쇄 반영 순으로 조기폐쇄를 추진하기로 했다는 게 공소장의 내용이다.

이젠 산업부가 한수원에 압박을 가할 차례였다. 백 전 장관 등 산업부 관계자들은 2017년 10월 24일 탈원전 로드맵을 의결하고 한수원에 “로드맵에 협조해달라”는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올해 2월 9일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이 구속영장 기각 직후 대전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뉴스1

올해 2월 9일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이 구속영장 기각 직후 대전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뉴스1

한수원에 도미노 압박…“몇십조 자산 폐기결정인데, 하소연하고 싶다” 

2017년 11월 초에는 한수원이 ‘월성1호기 조기폐쇄 및 신규원전 백지화’ 등의 문구를 포함해 설비현황 조사표를 작성하고 한국전력거래소에 제출하도록 산업부가 요구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자 한수원 직원은 “왜 우리한테 이런 것을 시키느냐”며 “정부 방침이 정해졌다면 그냥 산업부에서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직접 써넣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발했다고 한다.

이관섭 당시 한수원 사장에게도 압박이 가해졌지만, 이 전 사장은 “설비현황 조사표에는 사실관계만 쓸 수 있다”며 “월성1호기 조기폐쇄와 같은 내용은 쓸 수 없다”고 거부했다는 게 검찰의 조사 내용이다.

산업부 공무원들은 한수원 실무자에게 지시에 응하지 않을 경우 인사상 불이익을 가할 듯한 태도로 압박하기에 이르렀다고 검찰은 공소장을 통해 설명했다. 해당 실무자는 어쩔 수 없이 산업부의 요구대로 설비현황 조사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대로 제출하면 한수원이 조기폐쇄에 따른 책임을 모두 떠안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공소장에는 당시 한수원 직원이 산업부 지시의 부당함을 토로한 내용도 그대로 담겼다.

“이런저런 생각이 끝이 없네요. 다음 주 화요일 이사회에 우리 회사 20기에 가까운 원자력 발전소 폐지 계획을 저희 부서에서 보고하라네요. ㅠㅠ 몇십조, 몇백조짜리 자산에 대한 결정사항인데… 저는 못 한다고 하고 나왔습니다. 회사가 엄청 어수선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나 정말 걱정입니다. 누군가라도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습니다.”(2017년 11월 9일 한수원 직원 A씨가 지인에게 보낸 휴대전화 메시지)

검찰은 이날 대전지법 형사11부(부장 박헌행)가 진행한 첫 재판에서도 “채 전 비서관과 백 전 장관 등 청와대와 산업부 고위직이 조직적으로 권력을 남용한 범죄”라며 “지시와 보고 등이 모두 보고서 등으로 이뤄져 있으나 피고인들은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채 전 비서관, 백 전 장관, 정재훈 한수원 사장 측 변호인은 모두 “검찰이 피의사실 특정과 무관한 내용을 공소장에 마구 기재해 공소장 일본주의(一本主義)를 어겼다”라고 주장했다. 공소장 일본주의는 검사가 공소를 제기할 때 공소장만 법원에 제출하고 기타 서류나 증거물은 첨부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검찰은 이에 “범죄사실을 명확히 드러낼 수 있는 최소한의 사실관계만을 추려 공소장을 작성했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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