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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조국보다 더 나간 박범계의 권력 비리 수사 막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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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종민 변호사, 바른사회운동연합 공동대표

김종민 변호사, 바른사회운동연합 공동대표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1987년 1월 16일 전두환 정권 말기에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의 발표는 불의(不義)한 정치권력이 진실을 어떻게 은폐하고 왜곡하는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서울대생 박종철군의 목숨을 앗아간 경찰의 고문치사 및 은폐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것은 당국의 보도자료 때문이 아니었다. 언론의 자유와 진실을 실천한 현장 기자들의 치열한 노력 덕분임을 역사가 증명한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벌써 ‘경찰공화국’의 어두운 기억을 잊었나.

법무부는 2019년 말 조국 전 장관이 ‘인권 보호를 위한 수사공보 준칙’을 폐지하고 만든 규정을 재차 개정한 ‘형사 사건 공개 금지 등에 관한 규정’을 지난 17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내용을 보면 개악된 독소 조항들로 가득하다. 조 전 장관이 개정하고 추미애 전 장관 때 시행된 기존 규정으로도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 자유를 크게 제약했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박범계 장관은 더 나쁜 조항을 다수 신설했다.

‘형사사건 공개 금지 규정’ 또 개악
비리 수사 방해에 악용될 가능성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예외적으로 공개할 수 있는 형사 사건의 범위를 극도로 제한하고 각급 검찰청 인권보호관이 검사와 수사관에 대한 진상조사를 할 수 있도록 한 신설 대목이다. 피의자가 그 죄를 범했다고 믿을 만한 ‘객관적 정황’이 있는 경우에 한해 공개할 수 있고, 공개되는 정보도 ‘객관적이고 충분한’ 증거나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에 한정된다. 그런데 무엇이 ‘객관적 정황’이고 ‘객관적이고 충분한 증거나 자료’인지 모두 검찰의 자의적인 판단에 맡겨져 있다.

권력형 비리를 제대로 수사하는지 언론과 국민이 감시할 수 없어 깜깜이 수사가 될 수밖에 없다. 인권보호관의 검사와 수사관에 대한 진상 조사 규정은 수사의 독립성을 심각하게 침해할 위험이 있다. 언론사 종사자와 접촉해 ‘수사 정보를 의도적으로 유출한 것으로 의심할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 진상 조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인데 너무 모호하다. ‘상당한 이유’가 있는지를 객관적인 제3자가 판단할 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언론이 사건을 보도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의적으로 수사 검사를 소환 조사할 여지가 다분하다. 합법적 진상 조사를 가장해 권력형 비리 수사를 방해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진상 조사를 거쳐 범죄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경우 내사 사건으로 수리한다는 규정도 문제다. 진상조사와 내사의 경계가 모호한데 어떻게 양자를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의문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관할 범죄인 검사의 피의사실 공표도 검찰이 검사의 해당 범죄를 내사해 공수처에 이첩하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5공 군사정권 시절에도 기자들의 검사실 출입을 제한하거나 검사 접촉을 금지하지 않았는데, 이중 삼중으로 검사와 언론을 압박하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의도가 무엇인가.

박종철 사건의 진실이 어떻게 밝혀졌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문재인 정권의 반민주적 역주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5·18 등에 대한 ‘역사 왜곡 금지법’이 시행된 데 이어 전 세계가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악법으로 비판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도 집권 여당은 강행 처리하려 한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은 “인간은 이성과 진실의 지배를 받을 것이고, 진실에 모든 길을 열어 놓아야 하며, 이를 위해 지금까지 찾아낸 것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언론의 자유”라 역설했다.

무엇이 민주주의를 지속하게 하는가. 민주적 정당성을 갖는 입법부, 독립적인 사법부, 자유로운 언론은 민주적 제도의 근간이다. 진실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온전하지 못하다. 권력 비리를 독립적으로 수사하고, 언론이 자유롭게 취재·보도하고, 국민이 제대로 알고 판단하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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