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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곤 브리핑서 눈물 닦던 아프간 여기자…"뭉치지 않은 대가"

중앙일보

입력

20여 년 전 탈레반을 피해 미국으로 온 아프가니스탄 출신 언론인 나지라 카리미는 "자신들이 변했다는 탈레반의 주장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광조 기자]

20여 년 전 탈레반을 피해 미국으로 온 아프가니스탄 출신 언론인 나지라 카리미는 "자신들이 변했다는 탈레반의 주장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광조 기자]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점령한 직후인 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 국방부 기자회견에서 화제가 된 기자가 있다.
아프가니스탄 출신 프리랜서 언론인 나지라 카리미다.

울먹이며 "탈레반이 (카불의 대통령궁에서) 내 나라의 국기를 뗐다"는 말에 회견장이 숙연해졌고, "바이든 대통령은 가니 대통령이 우리 국민과 싸울 거라 했는데 어떻게 된 거냐"는 질문에 존 커비 대변인의 말문은 막혔다.

23일(현지시간) 워싱턴 라파예트 광장에서 카리미를 만났다. 기자와는 백악관 출입을 함께 하며 안면이 있는 사이다.

그는 기자회견 당일 아침 페이스북을 열었다가 타임라인에 뜬 국기가 (탈레반을 상징하는) 흰 깃발로 바뀌어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무너졌다고 했다.
그래서 일부러 아프간 국기가 그려진 마스크를 하고 회견장에 갔다고 했다.

"탈레반은 이데올로기…변하지 않아" 

카불에서 학업을 마친 뒤 곧장 기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90년대 말 탈레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향했다.
아프간을 점령했던 소련이 물러가면 자유가 찾아올 줄 알았지만, 탈레반이 집권하면서 더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 정치인의 목을 매달고 여성들의 집 밖 출입을 막으며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따라 신체 처벌까지 가했다.
카리미는 당시 상황을 "감옥"이라고 표현했다.

지난 16일(현지시간) 미 국방부 기자회견에서 "내 대통령 가니는 어디있느냐"고 존 커비 대변인에게 울먹이며 질문하는 나지라 카리미 기자(왼쪽). [인터넷 캡처]

지난 16일(현지시간) 미 국방부 기자회견에서 "내 대통령 가니는 어디있느냐"고 존 커비 대변인에게 울먹이며 질문하는 나지라 카리미 기자(왼쪽). [인터넷 캡처]

그때의 경험 탓에 "이제는 변할 것"이라는 탈레반을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탈레반이 지난해 아프간 정부와 맺은 평화협정을 2년도 안 돼 뒤집은 것을 지적했다.
"탈레반은 항상 거짓말을 해왔다"며 "여성 인권을 존중하겠다는 것도 국제사회에서 일단 인정을 받기 위한 방편일 뿐"이라고 봤다.
카리미는 "탈레반이 곧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바뀔 수가 없다"고 단언했다.

특히 아프간 아이들에 대한 교육을 걱정했다.
"탈레반은 마드라사라는 별도의 교육기관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칠 겁니다. 교육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탈레반 근본주의를 주입하는 것이죠. 아이들은 그렇게 미래의 탈레반 전사가 되는 겁니다."

"아프간 전쟁은 종교 전쟁 아닌 정치 전쟁" 

그는 "외국 군대 없이 독립해 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면서도 바이든 정부의 이번 철군은 너무 성급했다고 비판했다.
최소한 탈레반이 어느 정도 변했는지 확인하고 결정해도 늦지 않았을 거란 이야기다.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 일가가 부패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도 미국과 국제사회가 놔둔 것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고 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은 아프간에 수조 달러를 썼다”고 했지만, 그 돈 역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면서다.

"탈레반이 카불로 다가오는 동안 가니 대통령이 군인들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이야기엔 귀를 의심했다"며 그가 국외로 탈출했다는 소식에 분노가 더 커졌다고 했다.

그는 특히 "많은 사람이 아프간 전쟁을 이슬람 종교 전쟁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상 정치 전쟁"이라고 지적했다.
과거엔 동서양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위치가, 이제는 리튬·우라늄 등 막대한 양의 광물 자원이 핵심이란 것이다.
"소련이 와서 아프간을 이용하더니, 이어서 미국이 왔다 가고, 이제는 중국이 탈레반과 가까워지려 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초강대국들이 교대로 오고 있는 건데, 그 과정에서 희생된 것은 어느 편도 들지 않던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출신 언론인 나지라 카리미가 아프간 국기 색상으로 된 스카프를 들어보이며 ″탈레반에 의해 국기가 내려가는 모습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이광조 기자]

아프가니스탄 출신 언론인 나지라 카리미가 아프간 국기 색상으로 된 스카프를 들어보이며 ″탈레반에 의해 국기가 내려가는 모습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이광조 기자]

"아프간의 비극은 뭉치지 않았기 때문" 

지금 아프간 상황은 카리미가 떠난 20여 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비극이 그치지 않는 이유를 그는 내부적으로도 찾았다. "단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기회 될 때마다 아프간 사람들에게 "우리는 한 번도 서로 뭉친 적이 없다. 각자 파키스탄이나 이란, 러시아, 중국 등에 손을 벌리기만 했다"는 말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단결하지 않으면, 지금은 탈레반이지만 앞으로 또 어떤 이름의 집단이 나타나 아프간의 운명을 놓고 주사위를 굴리게 될지 모른다고 했다.

한 시간 정도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의 전화는 수시로 울렸다.
대부분 아프간 국가번호로 시작하는 전화였다. 그는 "아프간에 남아 있는 지인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계속 전화를 걸고 있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더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다른 나라 기자들로부터도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그는 관심을 가져준 한국에도 감사함을 표했다.
그는 "어느 나라도 아프가니스탄처럼 이방인에 점령당하는 비극을 겪지 않도록 서로 단합하기를 당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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