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전성철의 퍼스펙티브

언론자유가 압박당할 때 질식하는 건 민주주의, 그 자체

중앙일보

입력 2021.08.24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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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악법인 이유

전성철 기고

전성철 기고

정권이 언론의 오보에 대해 손해액의 5배에 달하는 징벌적 손해 배상을 하게 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한마디로 나라 망신을 듬뿍 시키는 악법이다.

민주주의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국민들이 마음대로 ‘외칠 수 있을 때’ 온다. 때로 그것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을 때라도 마음대로 외칠 수 있을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가능해진다. 한마디로, 임금님이 발가벗고 국민 앞에 나섰을 때, 누군가가 자유롭게 ‘임금님이 발가벗었다’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그 임금님이 피부와 똑같은 색으로 된, 몸에 딱 붙은 옷을 입고 나오는 바람에 멀리서 볼 때는 발가벗은 것으로 오인할 수도 있다. 그래도, 비록 틀릴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발가벗었다’고 외칠 수 있어야 민주주의가 가능한 것이다. 만일 임금님이 사실은 피부와 똑같은 색깔의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하면서 그 외친 자를 ‘허위사실 유포죄’ 로 처벌할 수 있다면 그다음부터는 아무도 함부로 외치지 못한다. 그러면 임금님은 정말로 발가벗고 거리를 활보하게 될 것이다. 독재는 그렇게 해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언론의 자유가 민주주의가 생존하는데 있어 ‘절대적’ 필요조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5배의 징벌적 손배추진, 헌법 정신에 맞지 않는 황당한 법
‘오보’와 ‘응징’의 차원 넘어 언론을 겁줘 사실 보도 못하게 해
‘임금님 발가벗었다’는 언론자유 무한 허용해야 민주주의 유지
세계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하는 창피한 법, 왜 강행하나

200여년 전, 아메리카 대륙에서 인류 역사상 듣도 보도 못했던 최초의 위대한 실험이 시작되었다. 소위 ‘민주주의’라는 것을 향한 실험이었다. 그러나 이 실험이 시작된 지 불과 10년 만에 이 건국의 아버지들은 그들이 애써 만든 헌법에 치명적 결함이 하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절대 절명의 필요조건이 빠져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언론의 자유’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상 무한히 허용되지 않는 한, 다시말해 누구나 ‘임금님이 발가벗었다’고 마음대로 외칠 수 있지 않는 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헌법 개정을 강행했다. 건국 15년 만에 있었던 ‘1차 수정 헌법’이다. 그 요지는 다른 많은 종류의 자유들과 달리, 언론의 자유만은 사실상 거의 무제한으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헌법의 확고한 명령이었다. 이 헌법적 요구는 지난 200여년 동안 수많은 판례 등을 통해 충실하게 구체화하여 왔다.

예를 들어보자. 1970년대, 어느 회사에서 직원이 사장에게 쌍욕을 했다. 화가 난 사장이 그를 쫓아내 버렸다. 직원이 소송을 냈다. 법원은 누구의 손을 들어줬을까? 그 직원의 손이다. 어떤 근거였을까? 사장이 부하의 ‘언론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언론의 자유는 이 정도로 ‘신성불가침’이다. 언론사의 언론 자유는 당연히 이보다 더 중시된다. 파급효과가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미국은 건국 약 100년 후, 남북 전쟁을 거치면서 진정한 민주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절대적 조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즉, 아무리 언론 자유가 있어도 사람을 함부로 차별하는 곳에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4번째 헌법 개정을 했다.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피부색·연령·성별·고향 같은 것들, 즉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차별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개의 원칙이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마차’의 두 바퀴였다. 이를 지키기 위해 미국 대법원은 아예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바로 ‘의심스러운 부류 (Suspect Class)’ 라는 용어다. 이것은 이 두 가지 원칙에 위배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케이스는 무조건 철저히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압도적 필요성과 당위성이 없는 한 이 원칙들을 위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정부가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민에게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해 (Clear and present Danger)’가 있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컴컴한 극장에서 불이 나지 않았는데도 누군가 “불이야”라고 외치는 행위 같은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닌 상황에서 개인이나 기관의 언론 자유가 제한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대법원이 1970년대 ‘포르노’의 위법성을 부인한 것도  바로 이 ‘언론의 자유’가 근거였다.

이 두 가지의 가치를 두 개의 바퀴로 삼아 지난 200여 년 동안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마차’는 순조롭게 전진하면서 인류 역사상 최고 수준의 민주주의를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물론 ‘언론의 자유’다.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 다른 한 ‘자유’가 보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에 비춰보았을 때, 지금 여당에서 추진 중인 언론 오보에 대한 5배의 징벌적 손해 배상법은 헌법 정신은 물론 논리에도, 조리에도 맞지 않는 정말 황당한 법이다. 한 마디로, 민주주의의 핵심 작동 원리를 모르는 ‘무식한’ 법이다. 이 법의 핵심은 다가가서 직접 보고 만져보고 나서야 ‘임금님이 발가벗었다’고 외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도대체 왜 언론사에 대해서만 5배의 징벌적 손해 배상을 허용하자고 하는 것인가? ‘칼’은 무척 유용하지만, 때로 흉기가 되기도 한다. 언론사도 당연히 실수가 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부당한 손해를 입힌 언론사에 대해서는 분명히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를 위한 다양한 수단들이 있다. 정정 보도, 손해 배상, 명예 훼손으로 인한 형사 처벌 등, 도대체 그것만으로는 보상이 불가능하다는 증거가 어디 있는가?

사실 언론사의 불법 행위가 야기하는 손해는 다른 범죄들, 예를 들어 불량 식품, 사기, 증권 시장 교란 등의 범죄보다 피해의 치유가 비교적 쉬운 편이다. 잘못된 보도를 한 언론사가 정정 보도를 내 보내게 되면, 그 최초의 잘못된 보도를 읽거나 본 시민의 대부분은 아마도 그 정정 보도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오보로 야기된 명예나 이미지의 추락은 대부분 치유될 수 있다. 그것으로 부족한 부분은 금전적 손해 배상으로 커버될 수 있다. 또 명예훼손등 형법적 처벌이 가능하다.

불량 식품, 사기, 증권 시장 교란 등 다른 수많은 ‘나쁜 짓’들이 일반 시민들에게 미치는 피해는 많은 경우 언론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광범위할 수도 있다. 또 대부분의 경우 그 치유도 비용·시간 등의 면에서 훨씬 더 어려운 경우가 많다. 사실, 많은 경우에 죄질과 피해 보상의 어려움 등으로 볼 때 이들이야말로 5배의 징벌적 손해 배상을 하도록 했으면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 배상제의 문제는 단순히 ‘오보’와 그에 대한 ‘응징’ 간의 비대칭성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의 근본 문제는 그 제도가 필연적으로 이 나라 민주주의의 작동을 심하게 훼손할 것이란 점이다. 왜냐하면, 이 제도는 사실상 언론에 대한 ‘공갈 협박’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겁을 주어 그 대상이 누구든, 함부로 ‘임금님이 발가벗었다’를 외치지 못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고, 또 그런 효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에도 ‘징벌적 손해 배상제’를 채택하는 나라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유독 언론의 오보에만, 이런 식으로 적용하는 것은 제대로 된 민주국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언론이 예뻐서가 아니다. 언론이란 한 마디로, 민주주의의 ‘심장 박동 장치’이기 때문이다. 언론의 자유가 압박당하고 제약될 때 정말 질식하는 것은 언론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민주주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명백한 위헌 소송 대상이다.

여당 국회의원들은 왜 이토록 뻔뻔하게 이런 짓을 태연히 할까? 정말 무식해서일까? 아니면, 그들이 한 짓, 그리고 앞으로 할 짓들에 ‘임금님이 발가벗었다’는 외침을 들을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일까? 세계 앞에 고개를 못 들 정도로 창피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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