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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대출 줄줄이 막혔다…이사철 앞두고 실수요자 패닉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다음달 전세 만기를 앞둔 직장인 박모(35·경기도 용인)씨. 집주인이 실거주하겠다고 해 4억원이던 전세보증금을 갱신 상한선(5%)보다 더 높인 7억5000만원으로 올려주고 계약을 연장하기로 했다. 그나마 이사 고민을 덜어 마음을 쓸어내렸던 그는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주거래 은행인 NH농협은행에서 전세대출을 중단하면서다. 박씨는 “기존에도 대출만으로는 자금이 충당이 안 돼 주식 등을 정리해야 했는데 주거래 은행에서 대출마저 막혀 상황이 더 막막해졌다”고 말했다.

우리은행 등 시중은행들이 전세대출을 중단하며 실수요자들이 고민에 빠졌다. 1일 오전 서울의 한 부동산중개업소에 월세 매물정보가 붙어 있다. 연합뉴스

우리은행 등 시중은행들이 전세대출을 중단하며 실수요자들이 고민에 빠졌다. 1일 오전 서울의 한 부동산중개업소에 월세 매물정보가 붙어 있다. 연합뉴스

금융당국발 '대출 절벽' 여파로 가을 이사철을 앞둔 실수요자들이 패닉에 빠졌다. 금융당국의 가계대출 관리 목표를 지키기 위해 NH농협은행과 우리은행이 전세대출을 중단하면서다. 농협은행은 가계대출 잔액이 지난해 말보다 7.1% 증가해 정부가 권고한 연간 가계대출 증가율(5~6%)을 초과해 주담대를 중단했다. 우리은행은 자체 관리 중인 전세대출 한도 초과가 원인이다.

시중은행 창구에는 전세대출 중단 소식에 불안해하는 고객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강남과 종로 등 직장인들이 많은 지점을 중심으로 점심시간 대에 평소보다 창구가 혼잡했다”며 “농협 거래 고객이 전세대출 가능 여부를 알아보거나 실수요자들이 잔금일에 맞춰 대출이 가능한지를 문의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11월 전세 만기인데 주거래 은행이 대출을 중단해 정말 답답하다” “9월 말 잔금인데 풍선효과로 다른 은행도 대출을 중단할지 걱정” “사회 초년생인 청년층은 다 월세집에들어가야 한다” 등의 불만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전세 실수요자들의 불만이 커지자 금융당국은 23일 “(농협은행과 우리은행을 제외한) 타 금융회사들로 대출 취급 중단이 확산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입장을 내놓으며 패닉의 진화에 나선 모양새다.

금융당국은 그동안 주택구입용 주담대와 신용대출 등을 옥죄면서도 전세대출에는 별다른 규제를 가하지 않았다. 실수요자들이 주로 받는 전세대출을 옥죌 경우 파급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난 7월부터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강화할 때도 전세대출만은 규제 대상에서 제외했다.

뛰는 가계대출 위에 나는 전세대출.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뛰는 가계대출 위에 나는 전세대출.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하지만 금융당국과 시중은행이 전세대출에 칼을 빼든 것은 이를 줄이지 않고서는 가계대출 관리가 불가능한 상황에 왔기 때문이다. 올해 1~7월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의 가계 전체대출 증가액은 25조1542억원이다.

이중 전세대출을 제외한 주택담보대출은 2조7051억원 늘어난 데 그쳤다. 4~6월에는 석 달 연속 대출 잔액이 감소했다. 각종 대출 규제의 영향으로 증가 속도가 눈에 띄게 떨어진 것이다.

반면 전세대출 증가세는 가파르다. 올해 들어 7월까지 5대 은행에서 늘어난 가계 전체대출(25조1542억원)의 절반 이상이 전세대출(13조937억원)이다. 이달 들어서도 20일까지 늘어난 대출만 9742억원이다.

7월 말 현재 5대 시중은행의 전세대출 잔액(118조3064억원)은 2019년 말(80조4532억원)보다 47%(37조8532억원)나 늘었다. 같은 기간 전체 가계대출 증가율은 13.8%였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융당국의 가계대출 권고를 일찌감치 초과한 농협 등의 입장에서는 전세대출을 닫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세대출이 이처럼 부풀어 오른 것은 전셋값 상승에 기인한다. KB부동산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평균 전셋값은 2019년 말 4억7436만원에서 지난달 6억3483만원으로 33.8%나 올랐다. 상승세에 불을 댕긴 건 지난해 7월 시행된 임대차3법이다. 일부 아파트의 경우 신규 계약과 갱신 계약 전셋값이 수억원 넘게 차이 나는 ‘이중 가격’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신용대출 한도 축소 등 금융당국의 전방위 대출규제가 부른 풍선효과도 전세대출 증가를 부추기고 있다. 신용상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보고서에서 "전세대출은 DSR 규제 대상에서 예외로 빠져있어 풍선효과로 인한 수요 확대가 불가피한 데다 전셋값 강세가 지속하며 향후에도 증가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치솟은 전셋값, 급증한 전세대출.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치솟은 전셋값, 급증한 전세대출.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급증하는 가계 빚으로 인한 금융 불안정을 막기 위한 취지에도 금융 당국의 옥죄기로 인한 '대출 절벽'이 전세 수요자 등 무주택자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면서, 정부의 정책 실패를 실수요자에게 떠넘긴다는 지적도 이어진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 교수는 "가계대출 잔액이 늘어난 건 결국 주택 가격과 전셋값이 올랐기 때문"이라며 "가계부채 관리도 연착륙이 실패하다 보니 경착륙을 시킬 수밖에 없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우격다짐식 대출 조이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 교수는 “총량 규제라는 거친 방식을 쓸 때는 실수요자의 자금 수요와 위험성 등에 대한 면밀한 평가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단 금융당국은 전세대출 중단이 다른 시중은행으로 확산할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국민은행(2.6%)과 신한은행(2.2%), 하나은행(4.4%) 등은 가계대출 증가율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풍선효과다. 농협과 우리은행 등의 대출 수요가 다른 시중은행으로 몰릴 경우, 해당 은행도 대출 문턱을 높일 수밖에 없다. 대출 금리를 올리거나 한도를 축소하는 게 대표적인 방법이다. 이 경우에도 실수요자들의 부담이 늘고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향후 금융당국이 전세대출 관리에 본격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승범 금융위원장 내정자는 지난 17일 "가계부채 안정을 위한 모든 조치를 강력하고 빠르게 추진해나갈 것"이라며 "최근 높은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는 주택 관련 대출 동향에 대해서도 그 원인 등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보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전세대출에 대해 규제할 생각은 없다”면서도 “전세대출이 매년 30%가량 늘어나는 등 증가속도가 줄어들지 않는다면 가계대출 관리 목표도 달성할 수 없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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