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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암' 형 먼저 떠났다…10년째 진행형, 가습기 살균제 비극

중앙일보

입력

23일 환경보건시민센터 선반에 올려진 가습기 살균제 제품들. 편광현 기자

23일 환경보건시민센터 선반에 올려진 가습기 살균제 제품들. 편광현 기자

23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환경보건시민센터 사무실. 선반 위에 판매가 종료된 '가습기 살균제' 상품들이 종류별로 진열됐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가습기 살균제로 피해를 본 형제 사례를 소개했다. 그의 손에는 2009년 3190개 생산됐다는 '함박웃음 가습기 세정제'가 들려있었다. 최 소장은 "함박웃음은커녕 소비자의 웃음을 뺏고 죽음을 안긴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올해로 가습기 살균제 사태가 세상에 알려진 지 10년째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아직도 힘든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들의 비극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날 직접 피해 사실 증언에 나선 김종제씨 형제가 그랬다.

'천식' 동생은 피해 인정, '폐암' 형은 불인정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김종제(59)씨는 2007년부터 GS함박웃음 가습기 세정제를 7~8차례 구매해 사용했다. 이 제품에는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 성분이 섞여 있었다. 해당 성분을 흡입하면 폐 섬유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씨는 2009년 호흡 곤란으로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천식 진단을 받았다.

김씨는 2015년이 돼서야 자신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관련 뉴스를 본 그는 환경부 산하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을 찾아갔고, 약 3년 뒤 피해자로 공식 인정받았다. 그는 "천식의 원인을 모르고 살다가 뒤늦게 알게 됐다. 피해자가 90만~10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아직 발견되지 않은 피해자들도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의 형 김병제(63)씨는 지난 4월 폐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김종제씨에 따르면 고인은 2009년 GS수퍼 청주시 상당점에서 GS함박웃음 가습기 살균제를 구입해 1~2년간 사용했다. 2018년 급성결핵으로 병원에 입원한 그는 이듬해 피해 사실을 신고했다. 하지만 환경산업기술원은 그가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된 건 맞지만, 그것이 폐암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23일 오전 11시 환경보건시민센터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편광현 기자

23일 오전 11시 환경보건시민센터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편광현 기자

피해자와 유족 "기업들, 배·보상 협의 참여해야"

이날 환경보건시민센터,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유족들은 "참사 공론화 10년을 맞이해 오는 31일까지 관련 기업 앞에서 기자회견, 1인시위 등 집중 행동을 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폐렴이 걸린 아내를 잃은 김태종(67)씨는 "GS리테일은 피해분담금을 냈음에도 책임이 없다며 배·보상 협의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제품을 안전성 검증 없이 판매한 잘못을 회피하고 발뺌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GS리테일뿐 아니라 가습기 살균제를 유통·판매한 LG생활건강 등 17개사도 배·보상 협의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단체에 따르면 현재 피해 보상과 관련해 협의를 진행 중인 곳은 옥시, SK 등 6개사에 불과하다.

식목일인 지난 4월 5일 가습기 살균제, 석면, 라돈침대로 희생된 환경피해자 추모의 숲 나무심기 행사가 서울 상암동 노을공원에서 열렸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족인 조병렬씨가 나무를 심은 뒤 눈물을 닦고 있다. 조씨 부인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숨졌다. 뉴스1

식목일인 지난 4월 5일 가습기 살균제, 석면, 라돈침대로 희생된 환경피해자 추모의 숲 나무심기 행사가 서울 상암동 노을공원에서 열렸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족인 조병렬씨가 나무를 심은 뒤 눈물을 닦고 있다. 조씨 부인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숨졌다. 뉴스1

사용자 890만명인데…피해 인정은 '4181명'

이 단체는 '피해자 찾기에 소극적'이라며 정부도 꼬집었다. 2019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94년부터 가습기 살균제 제품을 사용한 사람은 893만명으로 추정된다. 이중 건강피해자 95만명, 사망자는 2만명이다. 그런데 피해 지원을 신청한 사람은 7535명(20일 기준)뿐이다. 그중 피해가 인정된 사람은 4181명(이 중 1022명 사망)으로 더 적다.

최예용 소장은 "48종류 1000만개가 넘는 제품을 판매한 제조·판매사들이 자사 제품 피해 소비자를 찾지 않는 데다, 정부 역시 소극적으로 방관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참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6개 회사 제품에 KC 마크를 인증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 관련 질환을 폭넓게 인정하지 않는 부분도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환경부 관계자는 "꾸준히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를 찾고 있긴 하지만 먼저 신청을 해야 알 수 있는 상황이다. 관련 질환 인정 범위도 올해부터 소화기 장애, 폐암 등 신체 전체 대상으로 늘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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