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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서 온 형, 손바닥 굳은살도 없더라” 유족이 본 684부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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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반에 유골 걸고, 명령불복엔 처형” 증언 

실미도 사건 현장의 모습. [중앙포토]

실미도 사건 현장의 모습. [중앙포토]

“실미도에서 순직한 기간요원 역시 국가가 만든 무고한 희생자입니다.”

충북 제천시 봉양읍의 교회 목사인 김종오(70)씨는 실미도 사건 50주년을 맞은 23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을 찾아 큰 형 고(故) 김종화 중사(사망 당시 22세)를 추모했다. 김씨는 “684부대(공군 제2325전대 209파견대)에서 기간요원으로 근무하다 총상을 입고 세상을 떠난 큰 형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형 기일을 맞아 현충원을 찾았으나, 다른 유족을 볼 수 없었다. 실미도 사건이 세월에 묻히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김종화 중사는 1971년 8월 23일 발생한 실미도 사건의 희생자다. 당시 실미도에서 북한침투 훈련을 받던 공작원 24명이 섬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기간병 18명을 살해했다. 공작원들은 이후 군경과 대치하던 중 20명이 사망했다. 김 중사는 부대에서 기간요원으로 태권도 교관 임무 등을 수행했다고 한다. 사건 당일 훈련병이 쏜 총에 부상을 입고 동굴로 피신했지만, 이튿날 병원 후송 중 사망했다.

“일주일 전 먼 산 바라봐…사고 직감한 듯”

고 김중화 중사는 실미도 사건이 발생한 1971년 8월 23일 훈련병이 쏜 총탄에 부상을 당한 뒤 사망했다. [사진 김종오씨]

고 김중화 중사는 실미도 사건이 발생한 1971년 8월 23일 훈련병이 쏜 총탄에 부상을 당한 뒤 사망했다. [사진 김종오씨]

김 중사는 6남매 중 첫째였다. 둘째인 김씨는 큰 형을 자상하고 듬직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김씨는 “어머니는 입이 무겁고 침착한 형을 ‘물먹은 소’라고 불렀다”며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하는 법이 없었다. 실미도 부대에서 휴가를 나올 때도 ‘괜찮다’는 말만 했다”고 말했다.

김 중사는 휴가 때 줄무늬가 없는 국방색 군복에 권총을 차고 나왔다고 한다. 김씨는 “아버지는 휴가 중에 사고가 날까 봐 권총을 장롱 속에 넣어뒀다가 복귀 때 다시 줬다”며 “형은 입대 전에 늘 일기를 썼는데 실미도 근무 중에도 반드시 수양록을 썼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기록을 찾고 싶다”고 했다.

김 중사는 동생 김씨에게 가끔 부대 상황을 전했다고 한다. “아주 고된 훈련을 받고 있고, 유골을 내무반에 걸어놓기도 한다. 말을 듣지 않는 부대원은 처형한다”는 끔찍한 이야기였다. 김씨는 “형이 한 번은 훈련병을 데리고 인천에 있는 집창촌에 데리고 갔다고 말했다”며 “훈련병이 나올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가 부대로 복귀시킨 일도 얘기했다”고 말했다.

실미도 부대에선 공수훈련과 침투, 산악구보, 장애물 훈련 등이 진행됐다. 김씨는 “밧줄 타는 훈련을 얼마나 했는지 손바닥에 굳은살까지 다 떨어져 나가 건드리면 꼭 터질 것 같더라”며 “기간요원은 훈련병과 잠만 따로 잤을 뿐 열악한 환경에서 혹독한 훈련을 견뎌 온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유족 “순직했지만 보상 없어…홀대 아쉬워”

김종오씨가 23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고 김중화 중사의 묘역에 들러 참배했다. [사진 김종오씨]

김종오씨가 23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고 김중화 중사의 묘역에 들러 참배했다. [사진 김종오씨]

김씨 가족이 김 중사를 마지막으로 본 건 실미도 사건 일주일 전이다. 휴가를 나온 김 중사는 고향 집에 와서 넋이 나간 사람처럼 먼 곳만 바라봤다고 한다. 김씨는 “어머니께서 형에게 ‘무슨 근심이 있냐’고 물었더니, 형은 아무 일도 없다고 둘러댔다”며 “형은 부대로 복귀하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직감한 것 같다. 보급품이 끊기고, 북파 작전이 지연되면서 구성원간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김씨와 실미도 기간병 유족 11명은 2005년 “특수임무를 수행하다 순직한 기간요원에 대한 정부 보상이 필요하다”며 2000만~1억원 상당의 국가 보상을 신청했다. 하지만 특수임무수행자보상심의원회는 “기간병들은 북파공작을 위한 임무를 부여받지 않은 요원들로 보상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취지로 신청을 반려했다. 유족회는 관련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나, 2007년 패소했다.

김씨는 “관련법은 특수임무를 했거나, 관련 교육훈련을 받은 사람까지 보상 대상으로 정의하고 있다”며 “훈련병과 함께 훈련에 참여한 기간병에 대해 정부가 홀대하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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