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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충원까지 스며든 '신영복체'…홍범도 장군 묘비 보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홍범도 장군 묘비 '신영복 서체'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1868~1943) 장군의 현충원 묘비(墓碑) 글에는 고(故)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 서체(어깨동무체)가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홍범도 장군의 묘비에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의 손글씨를 본뜬 '신영복체'가 세겨져 있다. 뉴스1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홍범도 장군의 묘비에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의 손글씨를 본뜬 '신영복체'가 세겨져 있다. 뉴스1

23일 국립대전현충원과 국가보훈처 등에 따르면 지난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홍 장군 묘비에 새겨진 글귀 ‘애국지사 홍범도의 묘’와 묘비 뒷면 ‘1868년 8월27일 평양출생’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 서거’ 문구, 표지석 내용 서체는 이른바 ‘신영복체’다.

이 서체는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대선에서 사용한 슬로건인 ‘사람이 먼저다’와 같다. 손혜원 전 의원이 디자인한 소주 브랜드 ‘처음처럼’도 이 글씨체를 사용한다.

대전 현충원 "현충원에 신영복 서체는 처음"  

국립대전현충원 측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요청에 따라 해당 서체를 사용한 것이라고 했다.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이다. 대전현충원 관계자는 “국립묘지 묘비에 새기는 서체나 문구는 유족 요구에 따라 결정된다”라며 “하지만 홍 장군처럼 생존 유족이 없는 경우엔 기념사업회 등 의견을 따른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충원은 묘비 문구 등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제작만 할 뿐”며 “현충원에 신영복 서체가 등장한 것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 전 교수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1968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복역했다. 1988년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한 이후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1998년 사면 복권됐고, 2016년에 세상을 떠났다. 문 대통령은 평소 존경하는 사상가로 신 전 교수를 꼽아왔다.

국가정보원 원훈석에도 신영복 서체 

앞서 국가정보원은 새 원훈석(院訓石)에 새긴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이라는 문구를 신영복체로 써 논란이 되기도 했다. 간첩 수사 등을 주로 하는 국가기관에서 공안사범 서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국가정보원은 지난 6월 창설 60주년을 맞아 새 원훈석을 공개했다.

홍범도 장군(1868~1943) 묘비 표지석. 고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 서체를 사용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홍범도 장군(1868~1943) 묘비 표지석. 고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 서체를 사용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현충원법이 적용되는 현충원 묘비 크기는 묘역에 따라 정해진다. 애국지사 예우를 받는 홍범도 장군 묘역은 26.4㎡(8평)이다. 홍 장군 묘비는 좌대를 포함해서 높이가 186cm이다. 비석 폭은 가로 36cm, 세로 13cm이다. 화강석 재질의 비석 제작에는 정부예산 420만원이 쓰였다.

묘비에는 홍범도 장군 연보 등도 새겨 

홍범도 장군 묘비 좌대 표지석에는 ‘아 홍범도 장군/고통받는 민족과 늘 함께한 그대여/무명용사들과 총을 들고 떨쳐 일어나/민족의 독립을 향한 일념으로 일제에 맞선…그대의 숭고한 정신은 민족의 가슴에 통일의 넋으로 울려 퍼지리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홍범도 장군 묘비석 뒷면에 새긴 연보. 프리랜서 김성태

홍범도 장군 묘비석 뒷면에 새긴 연보. 프리랜서 김성태

좌대 뒷면에는 홍범도 장군 연보를 새겼다. ‘1895 명성 황후 시해 후 의병 결의 후 강원도 황해도 함경도 일대에서 수차례 전투’ ‘1907년 친일적 한국 정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에 항의, 포수와 농민을 규합하여 후지령전투와삼수성전투등 수십차례 전투’ 등이다.

하지만 논란이 일고 있는 1921년 이후 행적은 ‘1921년 자유시참변후 원동민족혁명단체 대표회의 참석. 동포들 생활향상을 위해 집단농장 운영’ ‘1943년 강제 이주후 크즐 오르다에서 서거’ 등으로 간략히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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